[남북불교교류 비망록이제, 다시 본다] 23. 2005년 평양 6.15통일대축전
[남북불교교류 비망록이제, 다시 본다] 23. 2005년 평양 6.15통일대축전
  • 이지범 북한불교연구소 소장
  • 승인 2022.03.21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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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서울, 장날에 들다”

제2의 6.15 남북공동선언이라 불리는 ‘민족통일선언’이 채택, 발표됐다. 2005년 남북한에는 해방 60돌과 6.15 공동선언 5주년 기념으로 6.15 민족통일대축전이 평양에서 열리면서 통일 열기가 넘쳐났다. 또 광복 60주년을 기념한 8.15 민족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면서 최고조에 달했다. 자주적 통일과 분단시대의 낡은 제도와 관념 개혁, 전쟁 위협과 군사적 대결 종식・항구적 평화실현, 민족공동의 번영과 발전을 향한 다방면적인 협력 등을 촉진하는 공동행사로 열렸다.

이때부터 남북 공동행사는 단순한 공동행사의 차원을 넘어 새로운 통일문화를 창출하고, 공유하는 만남의 공간으로 변모했다. 이뿐만 아니라 민간단체를 축으로 각계각층에서 다양하게 추진된 사회문화교류는 반세기 동안 형성된 가치관과 문화양식의 남북한 주민들이 낯선 이질감을 해소하고, 서로 공감해가는 일련의 장마당이었다. 5일장이 서는 장날엔 아무 일 없어도 장마당에 가듯 해마다 기다려지고, 그 소식을 그리워하는 그 날이 되었다.

장마당에 난장 펼쳐지듯이 2005년 6.15와 8.15 날엔 숱한 쟁이와 재담이 등장했다. 평양 통일대축전은 ‘서경 장날 분주하듯 재주꾼이 넘쳐났던 장마당’이었다. 이들은 엄숙하고 경건한 국가행사에 흥겨운 난장(亂場)을 터서 신명풀이 하는 축제 분위기로 바뀌었다. 북측 예술인들의 련환(聯歡) 공연무대에는 ‘우리는 하나’, ‘반갑습니다’. ‘통일 아리랑’ 곡들이 주류를 이뤘다. 여러 공동행사에서 선보인 공연들은 정치보다 문화예술의 힘이 더 큼을 보여주었다.

여기에다 힘을 보탠 남북한의 고승들이 있다. 이제, 두 분은 열반에 들어 만날 수 없다. 2005년 6월, 충남 예산 덕숭총림 수좌와 묘향산 관서총림의 방장은 평양에서 만나 법력게임(法擧揚, 선문답)을 처음 가졌다. 말 없는 말로 인사를 나누었던 그 날의 뒷이야기와 함께 그때 남북교류의 현장을 살펴본다.

6.15 민족통일대축전 개막식(2005.6.15. 평양 김일성경기장) 출처=민중의소리





평양직할시 중구역 개선문 옆쪽에 열린 야시장(2010.8.20.) 출처=Jon Dunbar의 페이스북



조선의 심장, 평양의 장마당

2005년 평양, 6.15 민족통일대축전은 ‘우리민족끼리의 장날’이 됐다. 2003년부터 북측기관에서만 운영하던 간이매대, 상점, 직매점 등은 6.15 통일대축전에서 민족 장마당의 별꽃으로 등장했다. 평양 거리와 공동행사가 열린 곳곳마다 평양직할시 인민봉사총국에서 허가받은 기관과 개인이 곳곳에 매대(판매점)를 꾸린 것이다. 꽃대와 뺏지 등 기념품과 청량음료를 판매하던 그때 진풍경은 1930년대 일제강점기에 촬영된 사진에서도 평양 우시장 등 장날 풍경과도 일맥상통한다.

오늘날 ‘혁명의 수도’라 부르는 평양에서의 6.15 민족통일대축전은 1929년에 처음 쓰인 ‘조선의 양대 도회인 평양과 경성’ 그중에서도 평양 곳곳에서 열린 장마당은 번개시장처럼 기억될 정도다. 우리 민족이 정서적으로 가지고 있는 물물교환의 DNA가 서로 교감하던 장마당의 으뜸은 흥정과 난장패였다.

이런 정서가 남아있는 북녘의 장마당은 1996년 ‘고난의 행군’ 시기에 다시 등장했다. 그 후 2003년 5월 당국의 지시로 공인된 종합시장(장마당)을 비롯해 골목시장, 야시장 등 갖가지 시장은 2005년 이후, 주민들의 생활 수요 80~90%를 해결할 만큼 확대됐다가 2008년 12월에 폐지되고, 농민 시장으로 다시 전환했다. 2010년 2월부터 종합시장이 재가동됐다고 한다.

“고양이 뿔 빼고 다 있다.”라는 북녘 장마당은 주민들 스스로가 만들어 낸 사실상의 시장경제다. 시장경제를 경험한 ‘장마당 세대’라고 불리는 MZ세대를 낳은 장마당은 2016년 10월 평양 중심가인 영광거리 뒤편의 ‘메뚜기 시장’에서 치약, 샴푸 같은 생필품과 단고기 등 육류 판매가 외국인 카메라에 목격될 정도였다.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곳에 어김없이 펼쳐지는 한뎃장(野市場)과 중소도시 뒷골목에 성행 중인 ‘메뚜기장’은 간이매대나 보자기를 펼쳐놓고 과자, 샴푸나 의약품 등을 팔다가 시장관리위원회(관리원)와 장마당 규찰대(단속반) 또는 인민보안성・검찰소에서 나오면 곧바로 짐을 싸 이리저리 이동하며 판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뙈기밭(텃밭) 작물을 팔 수 있는 장마당은 농민 시장으로 불린 당시에 채소와 과일・명태 같은 농수산물이 주류였는데, 거래 품목이 부쩍 늘어난 2010년부터는 과자와 비누・치약・화장품 같은 생필품이 인기였다. 중국 접경지와 라진-선봉경제특구와 개성공업지구에서 흘러나온 의류와 초코파이・간식용 소시지・막대커피로 불리는 커피믹스도 때론 거래되기도 할 뿐만 아니라, 2015년 이후에는 태양광 패널과 알루미늄창틀・통유리, 생수, 자동차 부속품 등이 유행하기도 했다.

상설시장의 개념조차 사라진 남녘과 달리 평양에서 열린 6.15 민족통일대축전은 분단 60년 만의 최대 장날이었다. 그간 남북정상회담이 정경분리 원칙에서 경제협력만이 부분적으로 이루진 남북교류에서 사회・문화 분야로 확대된 시기였다. 남북교류와 협력은 6.15 공동선언 이행과 실천이 여러 분야에서 이루어졌는데, 북측의 대규모 방문단이 남측을 처음 방문, 왕래하면서 치른 남북 공동행사는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국제적인 확인 공간으로 자리매김됐다.



6.15 민족통일대축전 입장 인사(2005.6.14. 평양 김일성경기장 로비) 사진=민중의소리.



북녘에서 부른 사자후

2005년 6월 14일~17일까지 평양에서 개최된 6.15 민족통일대축전은 대규모 행사라는 의미에서 ‘민족통일대회’의 펼침막이 곳곳에 내걸렸다.

북측의 6자회담 복귀 여부와 1년 넘게 꽉 막힌 국면 속에서 다시 열린 남북 공동행사는 6.15 남북해외공동행사 남측준비위원회 291명과 국외대표단 100여 명, 북측 대표단 100명(참관단 300명)이 함께했다. 그해 6월 14일 대한항공 특별기편으로 서해 직항로를 통해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남측대표단은 안경호 북측 준비위원장과 김정호 범민련 북측본부 부의장 등 대표단과 취재진, 청년취악단 등 70여 명의 환영을 받았다. 민간대표단은 고려호텔에 여장을 푼 다음, 만경대 소년학생궁전을 첫일정으로 참관했다. 남북 해외 민간대표단 700여 명은 저녁 7시 30분경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강한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평양 만수대동상 앞거리에서 천리마동상, 김일성경기장까지 2km 구간에 평양시민 6만 명의 환호를 받으며 민족통일대행진을 시작으로, 저녁 8시 김일성경기장에서 열린 민족통일대축전 개막식에 참석했다. 백화원초대소에 짐을 푼 남측 정부대표단은 개막식에 이어, 밤 10시 만수대 예술극장에서 북측의 박봉주 내각총리가 주최한 환영만찬에 참석했다.

이날 개막식에는 정동영 통일부 장관을 단장으로 한 남측대표단 40명과 북측대표단 25명이 주석단에, 10만여 명의 인파가 참여한 가운데 명실상부한 전민족적 대축전이 시작됐다. 남과 북・해외 민간대표단 공동사회로 진행된 행사는 밤 9시에 북측 취주악단과 한반도 단일기가 나란히 입장하면서 개막됐고, 남과 해외, 북측 순서로 행사의 의의를 다지는 연설이 이어졌다. 백낙청 상임대표는 “6.15 선언이 밝혀준 길을 따라 우리는 지난 5년간 화해와 단합, 통일의 의지를 실천해 왔다. 분단 60년이 되는 올해를 평화와 통일의 전환적 국면을 여는 해로 만들어 내자.”라고 개막연설을 했다.

이어서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김법장 남측위원회 명예대표는 “6.15 공동선언에 담긴 화해의 정신은 민족끼리 서로 대결하고 불신했던 과거의 멍에를 내려놓고, 그 위에 신뢰와 단결의 주춧돌을 올려놓았다. 6.15 공동선언의 이정표 아래 끊임없이 만나고 대화하고 협력해 나간다면, 그 속에서 평화가 싹트고 번영의 열매가 자라나게 될 것이다.” 또 “민간분야의 대화와 교류는 평화와 번영을 위한 구심적 역할을 훌륭히 해낼 수 있다. 민간이 힘을 합해야 당국을 움직일 수 있고, 당국이 머리를 맞대야 민족이 살 수 있다.”는 축하 연설로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해 6월 16일 오전, 만수대의사당을 방문한 남측 민간대표단의 백낙청 상임대표와 김법장 총무원장・박용길 장로・원희룡 한나라당 국회의원・김혜경 민주노동당 대표 등 16명과 집행위원장단 4명은 북측 최고인민회의 김영남 상임위원장을 접견하고 개별 악수와 기념촬영, 환담을 가졌다. 김영남 위원장은 박용길 장로에게 “문익환 목사님의 통일의 뜻을 이어 가시기 위해 고령에도 불구하고 계속 헌신하고 계시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또 김영남 상임위원장은 김법장 조계종 총무원장에게 “개막식 축하 연설이 내용도 좋았으며, 목청도 좋아 이번 축전에 큰 심금을 울려줬다.”라면서 각별한 고마움을 표시했다. 이에 대해 김법장 총무원장은 6.15 공동선언 발표 후, 남북관계의 변화를 거론하며 “평화통일을 위해 남북이 힘을 합쳐 최선을 다하자.”라고 화답해 박수를 이끌었다. 원희룡 의원은 “앞으론 한나라당도 평양에 자주 올 수 있게 해달라.”고 건의한 내용이 《민중의 소리》 (2005.6.16.)에 실려있다.

특히 6월 15일 아침과 저녁, 《조선중앙TV》에서 녹화중계 방송된 김법장 조계종 총무원장의 개막연설 장면은 분단 이래, 평양에서 울려 퍼진 최초의 법음으로 최고의 사자후로 남아 있다. 또 남측 정부대표단이 애초에 머물기로 했다가 취소된 주암초대소는 옛 주암사로, 흥부초대소는 일제강점기 때 31본산의 한 곳이던 평양 영명사를 특각 시설로 만든 곳이어서 비상한 관심이 쏠렸던 곳이었다.

자주적 평화통일의 새 전기를 마련한 2005년 6.15 민족통일대회는 그해 6월 15일 9시 30분부터 2시간 동안, 평양 4.25문화회관에서 6.15 남북해외 공동행사 준비위원회 주최로 ‘민족통일선언’ 5개항을 채택, 발표하면서다. 첫째, 6.15공동선언이 열어준 길을 따라 남북이 공존, 공영하고 하나의 민족으로 살아가려는 것은 우리 겨레의 한결같은 염원이며 의지이다. 둘째, 6.15 공동선언이 발표된 날을 6.15공동선언 발표 기념일(우리 민족끼리의 날)로 정하고, 민족공동으로 기념할 것이다. 셋째, 6.15공동선언을 철저히 이행하는 기본방도는 동족 사이의 공조를 실현하는 데 있다. 넷째, 온 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이 땅에서 핵전쟁의 위험을 제거하고 평화로운 삶의 터전을 가꾸어 나갈 것이다. 다섯째, 6.15공동위원회를 가장 폭넓고 위력한 통일애국 운동기구로 강화발전시켜 나갈 것이다. 예년 기념행사와 달리 6.15공동선언 발표 기념일 제정과 6.15공동위원회를 통일애국 운동기구로 강화하자는 내용은 민간통일운동이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가 됐다.

이와 같은 이면에는 제2의 통일시대를 열기 위해 2005년을 ‘자주통일의 원년’으로 만들자는 남북・해외 민간통일운동 진영의 의지가 반영됐다. 먼저 북측에서 2004년 12월 20일에 6.15북측위원회를 결성한 데, 이어 2005년 1월 31일에 6.15남측위원회가 공식 발족하고, 6.15해외측위원회는 2005년 3월 1일 중국 심양 칠보산호텔에서 결성됐다. 그해 3월 4일 금강산에서 ‘6.15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남북해외 공동행사 준비위원회’(약칭 6.15공동위)가 역사적으로 발족했다.

‘자주・평화・통일을 위한 8.15민족대축전’(이하 8.15대축전)은 그해 8월 14일~17일까지 서울에 열렸다. 김기남 조평통 부위원장을 단장으로 한 대표단 5명, 림동옥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 등 자문위원 3명, 지원인원 9명과 북측 163명(통일축구 선수단 포함)과 해외대표단 230여 명을 비롯한 남측 400여 명으로 8.15대축전 민간대표단이 구성됐다. 특히 북측 대표단 32명은 서울 도착행사로 14일 오후, 분단 이후 처음으로 국립현충원 현충탑을 참배했다. 이어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한라산과 백두산에서 채화된 성화 합화를 시작으로 대형 단일기를 앞세우고 민족대행진이 시작돼 6만여 관중들과 함께 8.15대축전 개막을 열었다. 15일 오전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광복 60돌을 맞아 남북 해외의 당국과 민간대표단 등 2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8.15민족대회에서 평화와 민족화합을 염원하는 ‘7천만 겨레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또 친선오락 경기를 마치고, 서대문형무소와 백범기념관을 방문하고, 8.15공동행사를 비롯한 고궁 관람 등 17일까지 진행했다. 6.15공동위원회를 중심으로 평양과 서울에서 공동행사를 개최함으로써 남북교류는 정착 단계로 진입하게 됐다.



김법장 총무원장과 박태화 위원장의 첫만남(2005.6.16. 평양 조불련청사) 사진=현대불교(2005.11.14.)



쌍림열반에 든 남북한 고승

남북의 두 리더는 2005년 6월 15일 오후 1시쯤 평양 조불련 청사에서 처음 만났다. 북녘 모란봉의 나반존자인 학림당 박태화 대선사와 덕숭산의 청사자로 불린 인곡당 김법장 대종사는 평양 모란봉구역 흥부동 청사의 마당에 마주 섰다. 한동안 아무런 말씀이 없었다. 그날을 예고하듯 염화미소의 선지(禪旨)를 들었다. ‘말 없는 말과 글 없는 글’로 무언의 법거량을 했다. 이날 법석에는 남측에서 진관・명진・법등・심경・정념 등 8명이 배석하고, 북측 조불련의 류인명 책임부원이 의전을 맡고, 조불련 임원과 신도들이 자리했다. 또 오후 5시부터 대성산 광법사에서 심상련 서기장이 법주를 맡아 ‘6.15 공동선언실천 조국통일기원 북남 불교 및 원불교 합동법회’를 가졌다.

공교롭게도 두 분은 2005년 하반기를 기해 쌍림(雙林) 열반에 들었다. 이때 남북 불교계도 공(空)에 이르렀다. 김법장 조계종 제31대 총무원장은 2005년 9월 11일 아침 3시 50분에, 《조선중앙통신》은 박태화 조불련 제3대 위원장이 그해 11월 11일 낮 12시 타계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1998년에 ‘조국통일상’을 수상한 학림대사는 2001년 금강산에서 열린 6.15 민족통일대토론회 개막연설을 하였으며, 2002년 서울에서 열린 8.15 민족통일대회를 위해 답방했다. 박 위원장의 유해는 항일투쟁, 사회주의 건설, 통일사업 등 여러 부문에 걸쳐 희생하거나 국가 위훈을 세운 공로자를 안치한 묘역으로 1986년 조성된 평양시 형제산구역 신미리의 애국열사릉에 안장돼 영면에 들었다.

반세기가 넘도록 각기 다른 체제로 살아온 남북은 그간 공동행사를 통해 내면에 잠재한 공감 능력을 재확인했다. 5년 동안 쌓인 좋은 경험들은 다시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듯이 교류의 기운이 도래하는 앞날을 기다리며, 그 시간은 다시 지금부터다.

# 다음 편은 ‘2005년 고려대장경 공동번역’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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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 민족통일대축전 개막식(2005.6.15. 평양 김일성경기장) 출처=민중의소리
평양직할시 중구역 개선문 옆쪽에 열린 야시장(2010.8.20.) 출처=Jon Dunbar의 페이스북
평양직할시 중구역 개선문 옆쪽에 열린 야시장(2010.8.20.) 출처=Jon Dunbar의 페이스북

조선의 심장, 평양의 장마당

2005년 평양, 6.15 민족통일대축전은 ‘우리민족끼리의 장날’이 됐다. 2003년부터 북측기관에서만 운영하던 간이매대, 상점, 직매점 등은 6.15 통일대축전에서 민족 장마당의 별꽃으로 등장했다. 평양 거리와 공동행사가 열린 곳곳마다 평양직할시 인민봉사총국에서 허가받은 기관과 개인이 곳곳에 매대(판매점)를 꾸린 것이다. 꽃대와 뺏지 등 기념품과 청량음료를 판매하던 그때 진풍경은 1930년대 일제강점기에 촬영된 사진에서도 평양 우시장 등 장날 풍경과도 일맥상통한다.

오늘날 ‘혁명의 수도’라 부르는 평양에서의 6.15 민족통일대축전은 1929년에 처음 쓰인 ‘조선의 양대 도회인 평양과 경성’ 그중에서도 평양 곳곳에서 열린 장마당은 번개시장처럼 기억될 정도다. 우리 민족이 정서적으로 가지고 있는 물물교환의 DNA가 서로 교감하던 장마당의 으뜸은 흥정과 난장패였다.

이런 정서가 남아있는 북녘의 장마당은 1996년 ‘고난의 행군’ 시기에 다시 등장했다. 그 후 2003년 5월 당국의 지시로 공인된 종합시장(장마당)을 비롯해 골목시장, 야시장 등 갖가지 시장은 2005년 이후, 주민들의 생활 수요 80~90%를 해결할 만큼 확대됐다가 2008년 12월에 폐지되고, 농민 시장으로 다시 전환했다. 2010년 2월부터 종합시장이 재가동됐다고 한다.

“고양이 뿔 빼고 다 있다.”라는 북녘 장마당은 주민들 스스로가 만들어 낸 사실상의 시장경제다. 시장경제를 경험한 ‘장마당 세대’라고 불리는 MZ세대를 낳은 장마당은 2016년 10월 평양 중심가인 영광거리 뒤편의 ‘메뚜기 시장’에서 치약, 샴푸 같은 생필품과 단고기 등 육류 판매가 외국인 카메라에 목격될 정도였다.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곳에 어김없이 펼쳐지는 한뎃장(野市場)과 중소도시 뒷골목에 성행 중인 ‘메뚜기장’은 간이매대나 보자기를 펼쳐놓고 과자, 샴푸나 의약품 등을 팔다가 시장관리위원회(관리원)와 장마당 규찰대(단속반) 또는 인민보안성・검찰소에서 나오면 곧바로 짐을 싸 이리저리 이동하며 판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뙈기밭(텃밭) 작물을 팔 수 있는 장마당은 농민 시장으로 불린 당시에 채소와 과일・명태 같은 농수산물이 주류였는데, 거래 품목이 부쩍 늘어난 2010년부터는 과자와 비누・치약・화장품 같은 생필품이 인기였다. 중국 접경지와 라진-선봉경제특구와 개성공업지구에서 흘러나온 의류와 초코파이・간식용 소시지・막대커피로 불리는 커피믹스도 때론 거래되기도 할 뿐만 아니라, 2015년 이후에는 태양광 패널과 알루미늄창틀・통유리, 생수, 자동차 부속품 등이 유행하기도 했다.

상설시장의 개념조차 사라진 남녘과 달리 평양에서 열린 6.15 민족통일대축전은 분단 60년 만의 최대 장날이었다. 그간 남북정상회담이 정경분리 원칙에서 경제협력만이 부분적으로 이루진 남북교류에서 사회・문화 분야로 확대된 시기였다. 남북교류와 협력은 6.15 공동선언 이행과 실천이 여러 분야에서 이루어졌는데, 북측의 대규모 방문단이 남측을 처음 방문, 왕래하면서 치른 남북 공동행사는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국제적인 확인 공간으로 자리매김됐다.

6.15 민족통일대축전 입장 인사(2005.6.14. 평양 김일성경기장 로비) 사진=민중의소리.
6.15 민족통일대축전 입장 인사(2005.6.14. 평양 김일성경기장 로비) 사진=민중의소리.

북녘에서 부른 사자후

2005년 6월 14일~17일까지 평양에서 개최된 6.15 민족통일대축전은 대규모 행사라는 의미에서 ‘민족통일대회’의 펼침막이 곳곳에 내걸렸다.

북측의 6자회담 복귀 여부와 1년 넘게 꽉 막힌 국면 속에서 다시 열린 남북 공동행사는 6.15 남북해외공동행사 남측준비위원회 291명과 국외대표단 100여 명, 북측 대표단 100명(참관단 300명)이 함께했다. 그해 6월 14일 대한항공 특별기편으로 서해 직항로를 통해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남측대표단은 안경호 북측 준비위원장과 김정호 범민련 북측본부 부의장 등 대표단과 취재진, 청년취악단 등 70여 명의 환영을 받았다. 민간대표단은 고려호텔에 여장을 푼 다음, 만경대 소년학생궁전을 첫일정으로 참관했다. 남북 해외 민간대표단 700여 명은 저녁 7시 30분경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강한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평양 만수대동상 앞거리에서 천리마동상, 김일성경기장까지 2km 구간에 평양시민 6만 명의 환호를 받으며 민족통일대행진을 시작으로, 저녁 8시 김일성경기장에서 열린 민족통일대축전 개막식에 참석했다. 백화원초대소에 짐을 푼 남측 정부대표단은 개막식에 이어, 밤 10시 만수대 예술극장에서 북측의 박봉주 내각총리가 주최한 환영만찬에 참석했다.

이날 개막식에는 정동영 통일부 장관을 단장으로 한 남측대표단 40명과 북측대표단 25명이 주석단에, 10만여 명의 인파가 참여한 가운데 명실상부한 전민족적 대축전이 시작됐다. 남과 북・해외 민간대표단 공동사회로 진행된 행사는 밤 9시에 북측 취주악단과 한반도 단일기가 나란히 입장하면서 개막됐고, 남과 해외, 북측 순서로 행사의 의의를 다지는 연설이 이어졌다. 백낙청 상임대표는 “6.15 선언이 밝혀준 길을 따라 우리는 지난 5년간 화해와 단합, 통일의 의지를 실천해 왔다. 분단 60년이 되는 올해를 평화와 통일의 전환적 국면을 여는 해로 만들어 내자.”라고 개막연설을 했다.

이어서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김법장 남측위원회 명예대표는 “6.15 공동선언에 담긴 화해의 정신은 민족끼리 서로 대결하고 불신했던 과거의 멍에를 내려놓고, 그 위에 신뢰와 단결의 주춧돌을 올려놓았다. 6.15 공동선언의 이정표 아래 끊임없이 만나고 대화하고 협력해 나간다면, 그 속에서 평화가 싹트고 번영의 열매가 자라나게 될 것이다.” 또 “민간분야의 대화와 교류는 평화와 번영을 위한 구심적 역할을 훌륭히 해낼 수 있다. 민간이 힘을 합해야 당국을 움직일 수 있고, 당국이 머리를 맞대야 민족이 살 수 있다.”는 축하 연설로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해 6월 16일 오전, 만수대의사당을 방문한 남측 민간대표단의 백낙청 상임대표와 김법장 총무원장・박용길 장로・원희룡 한나라당 국회의원・김혜경 민주노동당 대표 등 16명과 집행위원장단 4명은 북측 최고인민회의 김영남 상임위원장을 접견하고 개별 악수와 기념촬영, 환담을 가졌다. 김영남 위원장은 박용길 장로에게 “문익환 목사님의 통일의 뜻을 이어 가시기 위해 고령에도 불구하고 계속 헌신하고 계시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또 김영남 상임위원장은 김법장 조계종 총무원장에게 “개막식 축하 연설이 내용도 좋았으며, 목청도 좋아 이번 축전에 큰 심금을 울려줬다.”라면서 각별한 고마움을 표시했다. 이에 대해 김법장 총무원장은 6.15 공동선언 발표 후, 남북관계의 변화를 거론하며 “평화통일을 위해 남북이 힘을 합쳐 최선을 다하자.”라고 화답해 박수를 이끌었다. 원희룡 의원은 “앞으론 한나라당도 평양에 자주 올 수 있게 해달라.”고 건의한 내용이 《민중의 소리》 (2005.6.16.)에 실려있다.

특히 6월 15일 아침과 저녁, 《조선중앙TV》에서 녹화중계 방송된 김법장 조계종 총무원장의 개막연설 장면은 분단 이래, 평양에서 울려 퍼진 최초의 법음으로 최고의 사자후로 남아 있다. 또 남측 정부대표단이 애초에 머물기로 했다가 취소된 주암초대소는 옛 주암사로, 흥부초대소는 일제강점기 때 31본산의 한 곳이던 평양 영명사를 특각 시설로 만든 곳이어서 비상한 관심이 쏠렸던 곳이었다.

자주적 평화통일의 새 전기를 마련한 2005년 6.15 민족통일대회는 그해 6월 15일 9시 30분부터 2시간 동안, 평양 4.25문화회관에서 6.15 남북해외 공동행사 준비위원회 주최로 ‘민족통일선언’ 5개항을 채택, 발표하면서다. 첫째, 6.15공동선언이 열어준 길을 따라 남북이 공존, 공영하고 하나의 민족으로 살아가려는 것은 우리 겨레의 한결같은 염원이며 의지이다. 둘째, 6.15 공동선언이 발표된 날을 6.15공동선언 발표 기념일(우리 민족끼리의 날)로 정하고, 민족공동으로 기념할 것이다. 셋째, 6.15공동선언을 철저히 이행하는 기본방도는 동족 사이의 공조를 실현하는 데 있다. 넷째, 온 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이 땅에서 핵전쟁의 위험을 제거하고 평화로운 삶의 터전을 가꾸어 나갈 것이다. 다섯째, 6.15공동위원회를 가장 폭넓고 위력한 통일애국 운동기구로 강화발전시켜 나갈 것이다. 예년 기념행사와 달리 6.15공동선언 발표 기념일 제정과 6.15공동위원회를 통일애국 운동기구로 강화하자는 내용은 민간통일운동이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가 됐다.

이와 같은 이면에는 제2의 통일시대를 열기 위해 2005년을 ‘자주통일의 원년’으로 만들자는 남북・해외 민간통일운동 진영의 의지가 반영됐다. 먼저 북측에서 2004년 12월 20일에 6.15북측위원회를 결성한 데, 이어 2005년 1월 31일에 6.15남측위원회가 공식 발족하고, 6.15해외측위원회는 2005년 3월 1일 중국 심양 칠보산호텔에서 결성됐다. 그해 3월 4일 금강산에서 ‘6.15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남북해외 공동행사 준비위원회’(약칭 6.15공동위)가 역사적으로 발족했다.

‘자주・평화・통일을 위한 8.15민족대축전’(이하 8.15대축전)은 그해 8월 14일~17일까지 서울에 열렸다. 김기남 조평통 부위원장을 단장으로 한 대표단 5명, 림동옥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 등 자문위원 3명, 지원인원 9명과 북측 163명(통일축구 선수단 포함)과 해외대표단 230여 명을 비롯한 남측 400여 명으로 8.15대축전 민간대표단이 구성됐다. 특히 북측 대표단 32명은 서울 도착행사로 14일 오후, 분단 이후 처음으로 국립현충원 현충탑을 참배했다. 이어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한라산과 백두산에서 채화된 성화 합화를 시작으로 대형 단일기를 앞세우고 민족대행진이 시작돼 6만여 관중들과 함께 8.15대축전 개막을 열었다. 15일 오전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광복 60돌을 맞아 남북 해외의 당국과 민간대표단 등 2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8.15민족대회에서 평화와 민족화합을 염원하는 ‘7천만 겨레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또 친선오락 경기를 마치고, 서대문형무소와 백범기념관을 방문하고, 8.15공동행사를 비롯한 고궁 관람 등 17일까지 진행했다. 6.15공동위원회를 중심으로 평양과 서울에서 공동행사를 개최함으로써 남북교류는 정착 단계로 진입하게 됐다.

김법장 총무원장과 박태화 위원장의 첫만남(2005.6.16. 평양 조불련청사) 사진=현대불교(2005.11.14.)
김법장 총무원장과 박태화 위원장의 첫만남(2005.6.16. 평양 조불련청사) 사진=현대불교(2005.11.14.)

쌍림열반에 든 남북한 고승

남북의 두 리더는 2005년 6월 15일 오후 1시쯤 평양 조불련 청사에서 처음 만났다. 북녘 모란봉의 나반존자인 학림당 박태화 대선사와 덕숭산의 청사자로 불린 인곡당 김법장 대종사는 평양 모란봉구역 흥부동 청사의 마당에 마주 섰다. 한동안 아무런 말씀이 없었다. 그날을 예고하듯 염화미소의 선지(禪旨)를 들었다. ‘말 없는 말과 글 없는 글’로 무언의 법거량을 했다. 이날 법석에는 남측에서 진관・명진・법등・심경・정념 등 8명이 배석하고, 북측 조불련의 류인명 책임부원이 의전을 맡고, 조불련 임원과 신도들이 자리했다. 또 오후 5시부터 대성산 광법사에서 심상련 서기장이 법주를 맡아 ‘6.15 공동선언실천 조국통일기원 북남 불교 및 원불교 합동법회’를 가졌다.

공교롭게도 두 분은 2005년 하반기를 기해 쌍림(雙林) 열반에 들었다. 이때 남북 불교계도 공(空)에 이르렀다. 김법장 조계종 제31대 총무원장은 2005년 9월 11일 아침 3시 50분에, 《조선중앙통신》은 박태화 조불련 제3대 위원장이 그해 11월 11일 낮 12시 타계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1998년에 ‘조국통일상’을 수상한 학림대사는 2001년 금강산에서 열린 6.15 민족통일대토론회 개막연설을 하였으며, 2002년 서울에서 열린 8.15 민족통일대회를 위해 답방했다. 박 위원장의 유해는 항일투쟁, 사회주의 건설, 통일사업 등 여러 부문에 걸쳐 희생하거나 국가 위훈을 세운 공로자를 안치한 묘역으로 1986년 조성된 평양시 형제산구역 신미리의 애국열사릉에 안장돼 영면에 들었다.

반세기가 넘도록 각기 다른 체제로 살아온 남북은 그간 공동행사를 통해 내면에 잠재한 공감 능력을 재확인했다. 5년 동안 쌓인 좋은 경험들은 다시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듯이 교류의 기운이 도래하는 앞날을 기다리며, 그 시간은 다시 지금부터다.

# 다음 편은 ‘2005년 고려대장경 공동번역’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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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범
경북 경주 출생으로 1984년부터 불교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참여하다가 1990년 초, 법보종찰 해인사에 입산 환속했다. 1994년부터 남북불교 교류의 현장 실무자로 2000년부터 평양과 개성・금강산 등지를 다녀왔으며, 현재는 평화통일불교연대 운영위원장과 북한불교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남북불교 교류 60년사’ 등과 논문으로 ‘북한 주민들의 종교적 심성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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