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가 창건한 절의 지형 해골물사건
원효가 창건한 절의 지형 해골물사건
  • 김규순(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
  • 승인 2022.07.11 08: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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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불교풍수07
향일암원효좌선대_여수 향일암에 있는 원효좌선대이다. 원효는 전쟁터를 따라 다녔으므로 백제지역에도 그의 족적이 많이 남아 있다.



 

자장과 원효 그리고 의상은 우리나라의 불교의 성자들이다. 자장은 신라 불교의 토대를 만들었고 원효는 그 점정을 찍었고 민중불교를 지향하였다. 의상은 우리 불교의 방향을 제시했다. 원효(617-686)는 신라의 많은 승려들이 도를 깨우치기 위해 당나라로 유학을 갔던 것과는 달리 순수 국내파이다.

원효가 창건한 절을 지형적으로 분석하는데 있어서 득도(得道)를 한 661년을 기준으로 그 전에 창건한 절과 그 후에 창건한 절을 나누어서 살펴보기로 한다. 득도得道)이전과 득도得道)이후로 나누는 것은 이 시점을 기준으로 이상향을 짓는 그의 불교관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도를 깨친 시기는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가다가 해골물을 마신 사건이 기준이다.



오어사삿갓_오어사의 성보박물관에 원효의 삿갓과 숟가락이 보존되어 전한다.



 

원효의 불법(佛法)경지는 그의 저서에서 잘 나타나 있다. <금강삼매경론>은 일본에 전파되었고, <대승기신론소>는 요나라의 황제가 찬양할 정도였으며 10세기에 만들어진 <돈황판본>이 발견되어 당나라로 전파되었고, <십문화쟁론>은 인도에까지 전파될 정도였다. 따라서 원효는 해동의 석가모니라 불릴 정도였다. 원효는 분황사에서 <화엄경소>를 저술하였을 정도로 불교에 자유자재하였으며 그의 저서에 기인하여 혹자는 원효가 8지품 보살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8지품 보살은 자연의 법칙 뿐 아니라 우주의 원리까지 통달하였기에 석가모니 이후에 가장 높은 경지에 다다른 분으로 평가된다. 8지품 보살은 우주만물의 원리를 꿰뚫는 경지이므로 풍수지리에 대해서도 자유자재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661년 이전에 원효가 창건한 절은 여주 신륵사(632), 양산 원효암(643), 여수 향일암(644), 경주 금정사, 양산 미타암, 의정부 원효사(이상 647), 통영 안정사(654), 음성 미타사(654), 곡성 도림사, 문경 원적사(이상 660), 고양 흥국사, 부산 안적사(661) 등이다.

원효가 활약하던 시기는 그의 생애를 통틀어 삼국전쟁과 나당전쟁시기였다. 그가 출가한 계기도 친구가 전사했던 것에 기인한다. 절의 위치를 보면 신라의 변방이다. 경주는 왕경사찰이 들어서 있었고, 변방은 국토확장을 위한 전쟁터였으므로 군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종교시설이 필요했으며, 호국불교의 기치로 보급로를 확보하고 화랑의 전진기지로 절을 구축하였다. 불교가 왕실의 전유물에서 점차 귀족을 비롯한 지배층에게도 퍼져나가고 있을 때였지만 민중불교는 아직 요원한 일이었다. 불교사찰은 여전히 왕실의 영향 하에 있었고, 승려도 육두품이나 진골에서 주로 배출되었다.



여주신륵사남한강여주 신륵사는 남한강변에 있다. 홍수가 자주 일어나는 고장이라 평화 시에는 지역 주민에게 홍수를 알려주는 사찰이었겠지만, 삼국전쟁 시에는 군사의 이동과 물류를 보호하는 전진기지로 활용되었을 것이다.이로써 한강유역을 확보하여 통일신라의 기틀을 만들었다. 통일신라의 지리적 전략은 원효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향일암원효좌선대_여수 향일암에 있는 원효좌선대이다. 원효는 전쟁터를 따라 다녔으므로 백제지역에도 그의 족적이 많이 남아 있다.

 

자장과 원효 그리고 의상은 우리나라의 불교의 성자들이다. 자장은 신라 불교의 토대를 만들었고 원효는 그 점정을 찍었고 민중불교를 지향하였다. 의상은 우리 불교의 방향을 제시했다. 원효(617-686)는 신라의 많은 승려들이 도를 깨우치기 위해 당나라로 유학을 갔던 것과는 달리 순수 국내파이다.

원효가 창건한 절을 지형적으로 분석하는데 있어서 득도(得道)를 한 661년을 기준으로 그 전에 창건한 절과 그 후에 창건한 절을 나누어서 살펴보기로 한다. 득도得道)이전과 득도得道)이후로 나누는 것은 이 시점을 기준으로 이상향을 짓는 그의 불교관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도를 깨친 시기는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가다가 해골물을 마신 사건이 기준이다.

오어사삿갓_오어사의 성보박물관에 원효의 삿갓과 숟가락이 보존되어 전한다.
오어사삿갓_오어사의 성보박물관에 원효의 삿갓과 숟가락이 보존되어 전한다.

 

원효의 불법(佛法)경지는 그의 저서에서 잘 나타나 있다. <금강삼매경론>은 일본에 전파되었고, <대승기신론소>는 요나라의 황제가 찬양할 정도였으며 10세기에 만들어진 <돈황판본>이 발견되어 당나라로 전파되었고, <십문화쟁론>은 인도에까지 전파될 정도였다. 따라서 원효는 해동의 석가모니라 불릴 정도였다. 원효는 분황사에서 <화엄경소>를 저술하였을 정도로 불교에 자유자재하였으며 그의 저서에 기인하여 혹자는 원효가 8지품 보살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8지품 보살은 자연의 법칙 뿐 아니라 우주의 원리까지 통달하였기에 석가모니 이후에 가장 높은 경지에 다다른 분으로 평가된다. 8지품 보살은 우주만물의 원리를 꿰뚫는 경지이므로 풍수지리에 대해서도 자유자재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661년 이전에 원효가 창건한 절은 여주 신륵사(632), 양산 원효암(643), 여수 향일암(644), 경주 금정사, 양산 미타암, 의정부 원효사(이상 647), 통영 안정사(654), 음성 미타사(654), 곡성 도림사, 문경 원적사(이상 660), 고양 흥국사, 부산 안적사(661) 등이다.

원효가 활약하던 시기는 그의 생애를 통틀어 삼국전쟁과 나당전쟁시기였다. 그가 출가한 계기도 친구가 전사했던 것에 기인한다. 절의 위치를 보면 신라의 변방이다. 경주는 왕경사찰이 들어서 있었고, 변방은 국토확장을 위한 전쟁터였으므로 군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종교시설이 필요했으며, 호국불교의 기치로 보급로를 확보하고 화랑의 전진기지로 절을 구축하였다. 불교가 왕실의 전유물에서 점차 귀족을 비롯한 지배층에게도 퍼져나가고 있을 때였지만 민중불교는 아직 요원한 일이었다. 불교사찰은 여전히 왕실의 영향 하에 있었고, 승려도 육두품이나 진골에서 주로 배출되었다.

여주신륵사남한강여주 신륵사는 남한강변에 있다. 홍수가 자주 일어나는 고장이라 평화 시에는 지역 주민에게 홍수를 알려주는 사찰이었겠지만, 삼국전쟁 시에는 군사의 이동과 물류를 보호하는 전진기지로 활용되었을 것이다.이로써 한강유역을 확보하여 통일신라의 기틀을 만들었다. 통일신라의 지리적 전략은 원효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여주신륵사남한강여주 신륵사는 남한강변에 있다. 홍수가 자주 일어나는 고장이라 평화 시에는 지역 주민에게 홍수를 알려주는 사찰이었겠지만, 삼국전쟁 시에는 군사의 이동과 물류를 보호하는 전진기지로 활용되었을 것이다.이로써 한강유역을 확보하여 통일신라의 기틀을 만들었다. 통일신라의 지리적 전략은 원효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원효가 이 시기에 창건한 절은 신라가 삼국전쟁을 수행하는데 있어 전략적 필요에 의해 세워진 절이 많았다.

한강유역을 확보하기 위해 여주 신륵사, 의정부 원효사, 음성 미타사, 문경 원적사, 고양 흥국사 등이 건립되었고,

남해안 방어를 위해 여수 향일암, 통영 안정사, 부산 안적사 등이 세워졌고,

양산 원효암, 양산 미타암, 경주 금정사, 경산 반룡사는 경주로 들어오는 공격루틍의 길목에 세워 경주 방어에 목적을 두었다.

이들 사찰은 군사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조망권이 확보되고 몸을 숨길 수 있는 산의 고지대에 절터를 선택한 공통점이 있다.

원효가 선택한 가장 특이한 절터로는 여주 신륵사인데, 남한강변에 위치하여 물류통로를 확보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지만, 9룡이 연못에 살고 있어서 이들의 승천을 기다려 절을 지었다는 연기설화가 있는 만큼 불교가 여전히 토속종교와의 갈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후세에 최치원은 우리의 사상을 유불선이 어우러져 있는 고유의 사상인 풍류도라고 일컬었다.

원효의 지리선택에는 몇 가지 특성이 있다. 첫째 물이 절의 우측에서 발원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은 초기에 자장율사의 영향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둘째 바위가 있는 곳을 선호한 점은 인도불교의 특징이므로 원효가 인도불교경전을 섭렵하면서 터득한 지형선택의 기준이었을 것이다. 세째 절터를 능선 위보다는 좌우로 길쭉하게 공간이 확보되는 산비탈이 많은데 이는 전각을 좌우로 배치할 수 있는 음의지형이다. 음의 지형은 다양성과 평등성을 추구하는 공간으로 최적이다. 음의지형은 적의 눈에 잘 띄지 않으며 몸을 숨기는데 최적의 지형이다.

원효가 창건한 초기 절에서 그가 주장한 불교사상과 맥을 같이 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득도이전부터 신라 왕실불교와는 그 결을 달리하고 있음을 사찰공간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 다음은 원효의 불교사상이 어떻게 구현되는지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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