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에 돌아보는 일제 만행과 만해 스님 일성
8월에 돌아보는 일제 만행과 만해 스님 일성
  • 법응 스님
  • 승인 2022.08.08 16: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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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법응 스님

일본은 에도시대부터 네덜란드 등을 통해 유럽의 발전된 문물을 수입하면서 이를 난학(蘭学)이라 했으며 서양 학문을 통틀어 양학(洋学)이라 하였다. 일본은 19세기 소위 근대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등이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정한론(征朝論)을 펼쳤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조선을 강점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은 36년이 지나 1948년에 해방을 맞이하였으나 식민 역사는 청산되지 못했다. 1965년도의 그 기만적인 한일회담을 근거로 일본은 현재까지도 식민지배와 전쟁으로 인한 피해 보상은커녕, 역사 부정과 사죄 거부에 더하여 대한민국의 독도를 자국의 영토라는 주장마저 굽히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독도를 우리의 영토로 명확히 표기한 고지도나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배 및 그 피해의 흔적을 보여주는 유물들은 매우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필자 또한 그러한 사료들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바, 최근에 사료적으로 중요한 일본의 고지도 한 장을 접하게 되고, 또 이전까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식민지 시절에 생산된 물건 하나를 보게 되어 소개하고자 한다. 일본이 조선의 땅과 한민족의 정신세계를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유물들이다.

일본 전국지도 역사의 시작은 백제 출신으로 고지도 전문가의 글을 인용한다. “일본 전국지도의 제작 역사는 시대별로 극명하게 구분된다. 그 첫 번째가 백제에서 건너간 왕인(王仁) 박사의 후예인 행기(行基) 스님이 745년경 제작한 행기도(行基圖)이고, 1687년 이시카와 토모노부(石川流宣)의 본조도감강목(本朝圖鑑綱目)이 나올 때까지 1000년 가까이 일본 전국지도의 원형이 되었다.”(최선웅의 고지도 이야기, 월간 『산』 2017.5)

근대 일본의 관허지도로서 울릉도·독도를 조선의 영역으로 명기한 지도에 대해 살펴본다.『대일본국군여지노정전도(大日本國郡輿地路程全圖』가 발행(초판)된 것은 1779년 나가쿠보 세키스이(長久保赤水)에 의해서다. 그는 1775년에 일본 막부에 직접 제작한 『신각일본여지노정전도』에 대한 관허를 신청하였다가 거절당했다.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 영토로 오기됐다는 이유였다. 그에 따라 나가쿠보는 지도에서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의 영토와 동일한 채색을 하지 않고 일본 경위선 외곽에 그려 넣는, 즉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라는 표시 작업을 해야 했고 이를 완료(1778년)하고서야 1779년에 비로소 지도제작과 발행의 허가를 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지도에 울릉도와 독도에 대해 섬 명칭을 명기하고 문장을 기입했는데, 최선웅 선생의 『월간 산』같은 호에 등재된 글을 그대로 옮긴다.

“울릉도는 일본식 명칭으로 ‘다케시마(竹島)’로 표기되고, 그 옆에 ‘일명 이소다케시마(一云磯竹島)’를 부기했다. 독도는 ‘마쓰시마(松島)’라고 표기되었지만, 두 섬 옆에는 ‘견고려유운주망은주(見高麗猶雲州望隐州)’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이 문구는 1667년 운슈(雲州) 지역 마쓰에(松江)의 번사(藩士)인 사이토 호센(齋藤豊仙)이 번주(藩主)의 명으로 약 2개월간 일본의 외딴섬 인슈(隱州, 오키섬)를 돌아본 뒤 민간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기록한 <은주시청합기(隱州視聽合記)> 권1 국대기(國大記)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지도에 ‘견고려유운주망은주(見高麗猶雲州望隐州)’라는 문장과 함께 죽도(竹島울릉도)와 송도(松島독도)가 명기돼 있다. 우리학계는 “독도에서 고려(울릉도)를 보는 것은 운슈에서 인슈를 바라보는 것과 같다’고 해석해 울릉도·독도가 조선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최선웅 월간 <산>2017. 5)



‘견고려유운주망은주(見高麗猶雲州望隐州)’라는 문장이 관건인데, “고려를 보는 것은 일본의 운주에서 은주를 바라보는 것과 같다.”고 해석된다. 다시 말해서, 오키섬 사람들에게 인슈(隠州)와 운슈(雲州)가 일본 영토이듯 죽도(竹島울릉도)와 송도(松島독도)는 고려 즉 조선의 영토라는 의미다.

관허판본 이후에는 독도에 대해 탐심을 내서 위도선 안에 죽도(竹島울릉도)와 송도(松島독도)를 표기해서 자국의 섬인 것처럼 했다. 하지만 이미 제1차 관허판본에서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의 섬이라고 표시했기에 별다른 의미가 없으며 ‘견고려유운주망은주(見高麗猶雲州望隐州)’는 지속적으로 표기되었다.

<장황문화재연구소> 정찬정 대표가 1871년판 『개정일본여지노정전도』를 보존 처리 후 최종 점검을 하고 있다. 정찬정 대표는 고문헌 복원 분야의 최고 권위자다.



<장황문화재연구소> 정찬정 대표가 1871년판 『개정일본여지노정전도』를 보존 처리 후 최종 점검을 하고 있다. 정찬정 대표는 고문헌 복원 분야의 최고 권위자다.



『개정일본여노정전도』는 1779년 발행 이후 약 15회에 결처서 개정되었는데, 1판부터 1840년의 5판까지는 관허이고 이후는 대부분 해적판이다. 그 변천자체가 독도가 한국영토 임을 오히려 공고히 하고 있다. 본 지도는 『개정일본여지노정전도』를 스즈키엔(鈴木驥園)이 1852년 증정(增訂)한 것을 1871(명치4)년에 재각(再刻)한 지도다. 동경의 이즈모지 만지로(出雲寺万次郎)가 출판을 했으며. 여지노정전도 중에 가장 크고 공신력도 갖춘 지도다. 크기는 가로 277cm 세로 105cm로 대형이다. 대형인 만큼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다.



1871년에 재각된 『대일본국군여지노정전도(大日本國郡輿地路程全圖)』



일본 측에서는 본 지도의 울릉도와 독도가 표기된 위치나 문장에 대한 한국 학계의 해석과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나 설득력이 부족하고 한계성이 있다.

『개정일본여지노정전도』가 독도에 대한 오늘날의 일본의 주장과 인식에 관한 것인 반면, 이제 소개하려는 근대 유물은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 땅 자체에 대한 일본인들의 인식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

일제는 조선의 생산물을 수탈해서 일본으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론 대륙의 전쟁터로 운송하고자 철로를 부설했다. 경성과 부산 간 철로가 우선적으로 개통되었다. 이후에 일제는 그 지선으로 1910년 1월에 대전과 연산 간 구간을 시작으로 1914년 1월에는 대전과 목포를 연결하는 호남선 전 구간을 개통했다. 호남의 곡창지대에서 생산되는 쌀 등 농산물들을 목포항을 통해 운송하려는 의도였다.

일제는 이 개통식을 기념하기 위해서 기념품으로 재떨이를 제작했다. 한반도의 지형을 본으로 하여 만들어진 재떨이였다. 일제는 한반도 형태의 재떨이를 만들고 여기에 자신들이 개통시킨 주요 철로를 표시했다. 호남선의 최종 연결을 기념하기 위해 전라도 지역을 금색으로 칠을 해서 입히고 종착역이 되는 목포 지점엔 붉은 색으로 ‘목(木)’자를 양각해 넣었다.

일제가 호남선 개통을 축하하기 위해 제작한 한반도 모형의 재떨이



일제가 호남선 개통을 축하하기 위해 제작한 한반도 모형의 재떨이



지인이 보라며 건네주는 이 재떨이를 보는 순간 필자는 내 몸이 담뱃불에 지져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일제의 식민지 치하라 하나 국토형태의 재떨이를 기념품으로 제작해서 흡연자들로 하여금 재를 털고 종국에는 담배를 비벼서 끄게 했으니 일제가 우리의 나라 땅과 국민, 역사를 어찌 여겼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해방이 된지 77년이 지나고 있지만, 일본은 불법적 식민지배와 극악했던 전쟁범죄 행위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외면하고 있다. 심지어 특정 사안에 대해서는 그 범죄의 사실마저 부정하고 있다. 100여 년 전의 민족적 치욕과 인간이기에 겪어야 했던 고통의 감정은 현재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음이다.

일본과의 국가적, 민족적 감정의 해원은 가해국으로서의 일본이 자신들이 이웃국가에 대해 저지른 역사적 과오에 대해 인정하고 얼마나 정직한 자세로 사과와 보상을 하는지에 달렸다.

이 재떨이는 강점기 당시 경성부 남미창정(南米倉町 / 현재의 중구 남창동) 사또오상회(佐藤商会)에서 제작했다. 재떨이 바닥에 선명하게 표시돼 있다.



이 재떨이는 강점기 당시 경성부 남미창정(南米倉町 / 현재의 중구 남창동) 사또오상회(佐藤商会)에서 제작했다. 재떨이 바닥에 선명하게 표시돼 있다.
지도에 ‘견고려유운주망은주(見高麗猶雲州望隐州)’라는 문장과 함께 죽도(竹島울릉도)와 송도(松島독도)가 명기돼 있다. 우리학계는 “독도에서 고려(울릉도)를 보는 것은 운슈에서 인슈를 바라보는 것과 같다’고 해석해 울릉도·독도가 조선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최선웅 월간 <산>2017. 5)

‘견고려유운주망은주(見高麗猶雲州望隐州)’라는 문장이 관건인데, “고려를 보는 것은 일본의 운주에서 은주를 바라보는 것과 같다.”고 해석된다. 다시 말해서, 오키섬 사람들에게 인슈(隠州)와 운슈(雲州)가 일본 영토이듯 죽도(竹島울릉도)와 송도(松島독도)는 고려 즉 조선의 영토라는 의미다.

관허판본 이후에는 독도에 대해 탐심을 내서 위도선 안에 죽도(竹島울릉도)와 송도(松島독도)를 표기해서 자국의 섬인 것처럼 했다. 하지만 이미 제1차 관허판본에서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의 섬이라고 표시했기에 별다른 의미가 없으며 ‘견고려유운주망은주(見高麗猶雲州望隐州)’는 지속적으로 표기되었다.

<장황문화재연구소> 정찬정 대표가 1871년판 『개정일본여지노정전도』를 보존 처리 후 최종 점검을 하고 있다. 정찬정 대표는 고문헌 복원 분야의 최고 권위자다.

『개정일본여노정전도』는 1779년 발행 이후 약 15회에 결처서 개정되었는데, 1판부터 1840년의 5판까지는 관허이고 이후는 대부분 해적판이다. 그 변천자체가 독도가 한국영토 임을 오히려 공고히 하고 있다. 본 지도는 『개정일본여지노정전도』를 스즈키엔(鈴木驥園)이 1852년 증정(增訂)한 것을 1871(명치4)년에 재각(再刻)한 지도다. 동경의 이즈모지 만지로(出雲寺万次郎)가 출판을 했으며. 여지노정전도 중에 가장 크고 공신력도 갖춘 지도다. 크기는 가로 277cm 세로 105cm로 대형이다. 대형인 만큼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다.

1871년에 재각된 『대일본국군여지노정전도(大日本國郡輿地路程全圖)』

일본 측에서는 본 지도의 울릉도와 독도가 표기된 위치나 문장에 대한 한국 학계의 해석과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나 설득력이 부족하고 한계성이 있다.

『개정일본여지노정전도』가 독도에 대한 오늘날의 일본의 주장과 인식에 관한 것인 반면, 이제 소개하려는 근대 유물은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 땅 자체에 대한 일본인들의 인식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

일제는 조선의 생산물을 수탈해서 일본으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론 대륙의 전쟁터로 운송하고자 철로를 부설했다. 경성과 부산 간 철로가 우선적으로 개통되었다. 이후에 일제는 그 지선으로 1910년 1월에 대전과 연산 간 구간을 시작으로 1914년 1월에는 대전과 목포를 연결하는 호남선 전 구간을 개통했다. 호남의 곡창지대에서 생산되는 쌀 등 농산물들을 목포항을 통해 운송하려는 의도였다.

일제는 이 개통식을 기념하기 위해서 기념품으로 재떨이를 제작했다. 한반도의 지형을 본으로 하여 만들어진 재떨이였다. 일제는 한반도 형태의 재떨이를 만들고 여기에 자신들이 개통시킨 주요 철로를 표시했다. 호남선의 최종 연결을 기념하기 위해 전라도 지역을 금색으로 칠을 해서 입히고 종착역이 되는 목포 지점엔 붉은 색으로 ‘목(木)’자를 양각해 넣었다.

일제가 호남선 개통을 축하하기 위해 제작한 한반도 모형의 재떨이

지인이 보라며 건네주는 이 재떨이를 보는 순간 필자는 내 몸이 담뱃불에 지져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일제의 식민지 치하라 하나 국토형태의 재떨이를 기념품으로 제작해서 흡연자들로 하여금 재를 털고 종국에는 담배를 비벼서 끄게 했으니 일제가 우리의 나라 땅과 국민, 역사를 어찌 여겼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해방이 된지 77년이 지나고 있지만, 일본은 불법적 식민지배와 극악했던 전쟁범죄 행위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외면하고 있다. 심지어 특정 사안에 대해서는 그 범죄의 사실마저 부정하고 있다. 100여 년 전의 민족적 치욕과 인간이기에 겪어야 했던 고통의 감정은 현재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음이다.

일본과의 국가적, 민족적 감정의 해원은 가해국으로서의 일본이 자신들이 이웃국가에 대해 저지른 역사적 과오에 대해 인정하고 얼마나 정직한 자세로 사과와 보상을 하는지에 달렸다.

이 재떨이는 강점기 당시 경성부 남미창정(南米倉町 / 현재의 중구 남창동) 사또오상회(佐藤商会)에서 제작했다. 재떨이 바닥에 선명하게 표시돼 있다.

그러나 우리가 교훈으로 삼아야 할 만해 스님의 가르침이 있으니, 만해 스님은 “고금동서를 물론하고 국가의 흥망은 일조일석에 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나라든지 스스로 망하는 것이지 남의 나라가 남의 나라를 망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수백 년 부패한 정치와 현대문명에 뒤떨어져 나라가 망한 것이다.” “각성(覺醒) 없는 부패와 반성 없는 과거 집착이 나라를 사라지게 만든 근본 원인이다.” 라고 일갈했다.

‘각성’! 작금의 대한민국과 불교계의 현실에도 적용되는 금언 중의 금언이다. 이 덥고 혼란스럽기만 한 8월에 역사적 퇴행에 대한 각성을 상기하며 맺는다.

/ 法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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