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14. 몸 둘 곳도 마음 둘 곳도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14. 몸 둘 곳도 마음 둘 곳도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3.05.22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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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린 둥지에 비가 올까? 바람이 불까? 아침저녁으로 기도하며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기도하지만, 세상 바람은 비켜 가지 않고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산불처럼 준비도 없는 사람들에게 갑자기 칼을 들이민다. 넌 재수 없는 사람이니 아무것도 하지 마. 아무것도 안 했는데 갑자기 찾아온 엘리베이터 사고로 아파서 일을 못하고 수입이 없으니 가장으로 아버지로 늘 미안한데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아픈 몸을 이끌고 뭔가를 해 보려 하지만 자꾸만 뒤뚱대는 걸음마다 날개 다친 새처럼 퍼덕거린다. 세월이 쌓일 때마다 살림도 늘어 이민 가방 4개 달랑 들고 온 짐들이 구석마다 켜켜이 쌓여 있다. 아파트 매니저가 신발장도 버리고 화장실 선반도 버리고 부엌에 싱크대 밑 서랍장 물건도 버리고 창가에 일 미터 안에 아무것도 두지 말라고 하고 베란다 발도 새 걸로 바꾸라고 했다며 화살 맞은 새처럼, 칼 맞은 사슴처럼 놀라 말하는 아들 앞에 가뜩이나 힘이 없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온다. 지원금을 받기 위해 매니저에게 사인받은 후 우리 사정을 알고 쫓아내려는 것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는데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작가의 변

석 보원 스님의 사진에 폐지 줍는 할머니 사진을 보고 바로 든 생각이 삶의 무게였다.
그제 죽은 비둘기를 부리로 쪼며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까마귀를 보며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제 아파트 입구 잔디밭에 토끼 목을 파먹은 사체를 보았다. 토끼는 풀 뜯어 먹고 사는 초식동물이고 까마귀는 아무거나 다 먹는 잡식 동물이니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 새끼 토끼를 노리고 계속 쪼려고 쫓아 다니는 까마귀들을 보는 것은 낯선 풍경이 절대 아니다. 먹이 사슬에 의해 이루어지는 자연스러운 현상인 게다. 사람들은 때로 내가 약하다는 생각이 들 때 약자에 나를 투영하여 더욱 슬픔에 빠지게 되는 것 같다. 동병상련이란 말처럼.

사람 사는 인간사에도 늘 초식동물 같은 민초가 있고 잡식성으로 돈이 되는 것은 뭐든 먹어 치우는 인간도 많이 있다. 과자 한 봉지보다도 가벼운 영혼의 말에 따라 양심에 따라 움직인 다지만 그 가벼운 영혼을 송두리째 잊고 사는 몸뚱이들도 상당히 많다. 생각이란 걸 하지 않고 본능으로만 살면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니 순간적으론 정말 행복한 것이 아닐까 한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무거운 손수레에 폐지를 잔뜩 싣고 언덕을 오르는 노인은 영화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단골 레퍼토리이지만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단면이 아닐까. 그만큼 노인 복지가 넉넉하지 않다는 것과 의지대로 무언가를 열심히 할 수 있다는 양면이 존재한다. 나의 아버지 삶의 무게는 무엇이었을까? 어깨에 걸머지었던 지게였을까? 늦게라도 자식을 봐서 노년을 좀 더 편안하게 보내려 했는데 홀딱 외국으로 튀어 버린 아들이 삶의 무게로 짓누른 적은 없었을까? 태어나면서부터 도련님, 아씨로 불리면서 태어나는 금수저처럼 일반인들이 평생을 벌어도 벌 수 없는 재산이 어쩌면 그들에게는 삶의 무게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마이너스통장은 늘 꽉 차서 더 이상 곶감 빼 쓰듯 쓸 돈도 없는데 코비드라는 전염병은 어디에 취직을 못 하게 하고 어디 돈 나올 구멍도 없을 때 그 막막함처럼 우리에게 막다른 골목을 선물하는 그런 것이 삶의 무게가 아닐까? 저마다 적든 많든, 무겁던 가볍던 삶의 무게를 한 개씩 지고 삶을 살아간다. 물동이를 인 아낙처럼, 지게를 진 농부처럼.

아파트 매니저가 한바탕 휘젓고 지나간 후 대책을 세우며 주 정부 임대차중재위원회에 제소할까, 인권위원위에 제소할까 하다가 어떤 것도 하지 못했다. 결국 내가 던진 돌이 나에게 돌아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식구들이 만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여라도 이사 갈 방법은 있을까 하고 크레그리스트라는 교차로 같은 웹사이트를 찾아보니 방 하나에 한 달 임대료가 2,000불이다. 그것도 주택 지하나 반지하다. 아내는 처음 이민왔을 때도 캐나다까지 와서 반지하에 살아야 하겠냐고 말했었다. 그런데 방 2개는 2,000불에서 3,000불을 넘는 것도 있고 3 베드 룸은 한 달에 6,000불을 넘기는 것도 있다. 한국 돈으로 한 달에 600만 원이다.

전에도 신청했던 비씨 하우징에 신청서를 냈다. 그런데 조건이 25살 이상의 자녀는 동거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아파서 정부 지원금을 받는 경우를 제외하고 가족이 함께 살 수 없는 것이다. 혹시나 하고 신청하니 1베드룸만 신청할 수 있다. 즉 아내와 나만 들어갈 수 있다.

그래도 신청서를 작성했는데 다음 날 바로 우편물이 왔다. 첨부 서류를 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내에게 말을 했더니 아내가 말도 안 된다고 말했다. 아이들을 두고 어딜 가냐고 하면서 가려면 혼자 가라고 말했다. 그래도 딸과 아들하고 상의하려고 했더니 말만 해봐하고 겁을 준다.

그리고 저녁에 딸에게 말을 하니 딸은 이미 알고 있었다. 찾아봤다면서 방법이 그것밖에 없으면 그렇게 해야지 어떻게 하겠냐고 했다. 아내가 절대 안 된다면서 가려면 너 혼자 가라고 했다. 나도 식구가 뿔뿔이 흩어지는 것은 싫다. 하지만 아파트 매니저가 정말 우릴 쫓아낸다면 우리는 갈 곳이 없다. 우리 수입에 임대할 수 있는 곳은 없다. 아들은 “아빠가 전에 있던 아파트를 팔아서 그래”라고 날 원망했고 아내는 “하지 말라는 비지니스를 해서 그래”라고 날 원망했다. 지금 내가 스트로크(뇌경색)으로 아파서 일정부 지원을 신청한 상태인데 일을 못 하니 모든 원망이 내게 돌아왔다.

빌린 둥지에 비가 올까? 바람이 불까? 아침저녁으로 기도하며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기도하지만, 세상 바람은 비켜 가지 않고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산불처럼 준비도 없는 사람들에게 갑자기 칼을 들이민다. 넌 재수 없는 사람이니 아무것도 하지 마. 아무것도 안 했는데 갑자기 찾아온 엘리베이터 사고로 아파서 일을 못하고 수입이 없으니 가장으로 아버지로 늘 미안한데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아픈 몸을 이끌고 뭔가를 해 보려 하지만 자꾸만 뒤뚱대는 걸음마다 날개 다친 새처럼 퍼덕거린다. 세월이 쌓일 때마다 살림도 늘어 이민 가방 4개 달랑 들고 온 짐들이 구석마다 켜켜이 쌓여 있다. 아파트 매니저가 신발장도 버리고 화장실 선반도 버리고 부엌에 싱크대 밑 서랍장 물건도 버리고 창가에 일 미터 안에 아무것도 두지 말라고 하고 베란다 발도 새 걸로 바꾸라고 했다며 화살 맞은 새처럼, 칼 맞은 사슴처럼 놀라 말하는 아들 앞에 가뜩이나 힘이 없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온다. 지원금을 받기 위해 매니저에게 사인받은 후 우리 사정을 알고 쫓아내려는 것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는데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빌린 둥지에 비가 올까? 바람이 불까? 아침저녁으로 기도하며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기도하지만, 세상 바람은 비켜 가지 않고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산불처럼 준비도 없는 사람들에게 갑자기 칼을 들이민다. 넌 재수 없는 사람이니 아무것도 하지 마. 아무것도 안 했는데 갑자기 찾아온 엘리베이터 사고로 아파서 일을 못하고 수입이 없으니 가장으로 아버지로 늘 미안한데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아픈 몸을 이끌고 뭔가를 해 보려 하지만 자꾸만 뒤뚱대는 걸음마다 날개 다친 새처럼 퍼덕거린다. 세월이 쌓일 때마다 살림도 늘어 이민 가방 4개 달랑 들고 온 짐들이 구석마다 켜켜이 쌓여 있다. 아파트 매니저가 신발장도 버리고 화장실 선반도 버리고 부엌에 싱크대 밑 서랍장 물건도 버리고 창가에 일 미터 안에 아무것도 두지 말라고 하고 베란다 발도 새 걸로 바꾸라고 했다며 화살 맞은 새처럼, 칼 맞은 사슴처럼 놀라 말하는 아들 앞에 가뜩이나 힘이 없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온다. 지원금을 받기 위해 매니저에게 사인받은 후 우리 사정을 알고 쫓아내려는 것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는데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작가의 변

석 보원 스님의 사진에 폐지 줍는 할머니 사진을 보고 바로 든 생각이 삶의 무게였다.
그제 죽은 비둘기를 부리로 쪼며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까마귀를 보며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제 아파트 입구 잔디밭에 토끼 목을 파먹은 사체를 보았다. 토끼는 풀 뜯어 먹고 사는 초식동물이고 까마귀는 아무거나 다 먹는 잡식 동물이니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 새끼 토끼를 노리고 계속 쪼려고 쫓아 다니는 까마귀들을 보는 것은 낯선 풍경이 절대 아니다. 먹이 사슬에 의해 이루어지는 자연스러운 현상인 게다. 사람들은 때로 내가 약하다는 생각이 들 때 약자에 나를 투영하여 더욱 슬픔에 빠지게 되는 것 같다. 동병상련이란 말처럼.

사람 사는 인간사에도 늘 초식동물 같은 민초가 있고 잡식성으로 돈이 되는 것은 뭐든 먹어 치우는 인간도 많이 있다. 과자 한 봉지보다도 가벼운 영혼의 말에 따라 양심에 따라 움직인 다지만 그 가벼운 영혼을 송두리째 잊고 사는 몸뚱이들도 상당히 많다. 생각이란 걸 하지 않고 본능으로만 살면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니 순간적으론 정말 행복한 것이 아닐까 한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무거운 손수레에 폐지를 잔뜩 싣고 언덕을 오르는 노인은 영화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단골 레퍼토리이지만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단면이 아닐까. 그만큼 노인 복지가 넉넉하지 않다는 것과 의지대로 무언가를 열심히 할 수 있다는 양면이 존재한다. 나의 아버지 삶의 무게는 무엇이었을까? 어깨에 걸머지었던 지게였을까? 늦게라도 자식을 봐서 노년을 좀 더 편안하게 보내려 했는데 홀딱 외국으로 튀어 버린 아들이 삶의 무게로 짓누른 적은 없었을까? 태어나면서부터 도련님, 아씨로 불리면서 태어나는 금수저처럼 일반인들이 평생을 벌어도 벌 수 없는 재산이 어쩌면 그들에게는 삶의 무게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마이너스통장은 늘 꽉 차서 더 이상 곶감 빼 쓰듯 쓸 돈도 없는데 코비드라는 전염병은 어디에 취직을 못 하게 하고 어디 돈 나올 구멍도 없을 때 그 막막함처럼 우리에게 막다른 골목을 선물하는 그런 것이 삶의 무게가 아닐까? 저마다 적든 많든, 무겁던 가볍던 삶의 무게를 한 개씩 지고 삶을 살아간다. 물동이를 인 아낙처럼, 지게를 진 농부처럼.

아파트 매니저가 한바탕 휘젓고 지나간 후 대책을 세우며 주 정부 임대차중재위원회에 제소할까, 인권위원위에 제소할까 하다가 어떤 것도 하지 못했다. 결국 내가 던진 돌이 나에게 돌아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식구들이 만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여라도 이사 갈 방법은 있을까 하고 크레그리스트라는 교차로 같은 웹사이트를 찾아보니 방 하나에 한 달 임대료가 2,000불이다. 그것도 주택 지하나 반지하다. 아내는 처음 이민왔을 때도 캐나다까지 와서 반지하에 살아야 하겠냐고 말했었다. 그런데 방 2개는 2,000불에서 3,000불을 넘는 것도 있고 3 베드 룸은 한 달에 6,000불을 넘기는 것도 있다. 한국 돈으로 한 달에 600만 원이다.

전에도 신청했던 비씨 하우징에 신청서를 냈다. 그런데 조건이 25살 이상의 자녀는 동거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아파서 정부 지원금을 받는 경우를 제외하고 가족이 함께 살 수 없는 것이다. 혹시나 하고 신청하니 1베드룸만 신청할 수 있다. 즉 아내와 나만 들어갈 수 있다.

그래도 신청서를 작성했는데 다음 날 바로 우편물이 왔다. 첨부 서류를 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내에게 말을 했더니 아내가 말도 안 된다고 말했다. 아이들을 두고 어딜 가냐고 하면서 가려면 혼자 가라고 말했다. 그래도 딸과 아들하고 상의하려고 했더니 말만 해봐하고 겁을 준다.

그리고 저녁에 딸에게 말을 하니 딸은 이미 알고 있었다. 찾아봤다면서 방법이 그것밖에 없으면 그렇게 해야지 어떻게 하겠냐고 했다. 아내가 절대 안 된다면서 가려면 너 혼자 가라고 했다. 나도 식구가 뿔뿔이 흩어지는 것은 싫다. 하지만 아파트 매니저가 정말 우릴 쫓아낸다면 우리는 갈 곳이 없다. 우리 수입에 임대할 수 있는 곳은 없다. 아들은 “아빠가 전에 있던 아파트를 팔아서 그래”라고 날 원망했고 아내는 “하지 말라는 비지니스를 해서 그래”라고 날 원망했다. 지금 내가 스트로크(뇌경색)으로 아파서 일정부 지원을 신청한 상태인데 일을 못 하니 모든 원망이 내게 돌아왔다.

#작가의 변

석 보원 스님의 사진에 폐지 줍는 할머니 사진을 보고 바로 든 생각이 삶의 무게였다.
그제 죽은 비둘기를 부리로 쪼며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까마귀를 보며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제 아파트 입구 잔디밭에 토끼 목을 파먹은 사체를 보았다. 토끼는 풀 뜯어 먹고 사는 초식동물이고 까마귀는 아무거나 다 먹는 잡식 동물이니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 새끼 토끼를 노리고 계속 쪼려고 쫓아 다니는 까마귀들을 보는 것은 낯선 풍경이 절대 아니다. 먹이 사슬에 의해 이루어지는 자연스러운 현상인 게다. 사람들은 때로 내가 약하다는 생각이 들 때 약자에 나를 투영하여 더욱 슬픔에 빠지게 되는 것 같다. 동병상련이란 말처럼.

사람 사는 인간사에도 늘 초식동물 같은 민초가 있고 잡식성으로 돈이 되는 것은 뭐든 먹어 치우는 인간도 많이 있다. 과자 한 봉지보다도 가벼운 영혼의 말에 따라 양심에 따라 움직인 다지만 그 가벼운 영혼을 송두리째 잊고 사는 몸뚱이들도 상당히 많다. 생각이란 걸 하지 않고 본능으로만 살면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니 순간적으론 정말 행복한 것이 아닐까 한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무거운 손수레에 폐지를 잔뜩 싣고 언덕을 오르는 노인은 영화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단골 레퍼토리이지만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단면이 아닐까. 그만큼 노인 복지가 넉넉하지 않다는 것과 의지대로 무언가를 열심히 할 수 있다는 양면이 존재한다. 나의 아버지 삶의 무게는 무엇이었을까? 어깨에 걸머지었던 지게였을까? 늦게라도 자식을 봐서 노년을 좀 더 편안하게 보내려 했는데 홀딱 외국으로 튀어 버린 아들이 삶의 무게로 짓누른 적은 없었을까? 태어나면서부터 도련님, 아씨로 불리면서 태어나는 금수저처럼 일반인들이 평생을 벌어도 벌 수 없는 재산이 어쩌면 그들에게는 삶의 무게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마이너스통장은 늘 꽉 차서 더 이상 곶감 빼 쓰듯 쓸 돈도 없는데 코비드라는 전염병은 어디에 취직을 못 하게 하고 어디 돈 나올 구멍도 없을 때 그 막막함처럼 우리에게 막다른 골목을 선물하는 그런 것이 삶의 무게가 아닐까? 저마다 적든 많든, 무겁던 가볍던 삶의 무게를 한 개씩 지고 삶을 살아간다. 물동이를 인 아낙처럼, 지게를 진 농부처럼.

아파트 매니저가 한바탕 휘젓고 지나간 후 대책을 세우며 주 정부 임대차중재위원회에 제소할까, 인권위원위에 제소할까 하다가 어떤 것도 하지 못했다. 결국 내가 던진 돌이 나에게 돌아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식구들이 만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여라도 이사 갈 방법은 있을까 하고 크레그리스트라는 교차로 같은 웹사이트를 찾아보니 방 하나에 한 달 임대료가 2,000불이다. 그것도 주택 지하나 반지하다. 아내는 처음 이민왔을 때도 캐나다까지 와서 반지하에 살아야 하겠냐고 말했었다. 그런데 방 2개는 2,000불에서 3,000불을 넘는 것도 있고 3 베드 룸은 한 달에 6,000불을 넘기는 것도 있다. 한국 돈으로 한 달에 600만 원이다.

전에도 신청했던 비씨 하우징에 신청서를 냈다. 그런데 조건이 25살 이상의 자녀는 동거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아파서 정부 지원금을 받는 경우를 제외하고 가족이 함께 살 수 없는 것이다. 혹시나 하고 신청하니 1베드룸만 신청할 수 있다. 즉 아내와 나만 들어갈 수 있다.

그래도 신청서를 작성했는데 다음 날 바로 우편물이 왔다. 첨부 서류를 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내에게 말을 했더니 아내가 말도 안 된다고 말했다. 아이들을 두고 어딜 가냐고 하면서 가려면 혼자 가라고 말했다. 그래도 딸과 아들하고 상의하려고 했더니 말만 해봐하고 겁을 준다.

그리고 저녁에 딸에게 말을 하니 딸은 이미 알고 있었다. 찾아봤다면서 방법이 그것밖에 없으면 그렇게 해야지 어떻게 하겠냐고 했다. 아내가 절대 안 된다면서 가려면 너 혼자 가라고 했다. 나도 식구가 뿔뿔이 흩어지는 것은 싫다. 하지만 아파트 매니저가 정말 우릴 쫓아낸다면 우리는 갈 곳이 없다. 우리 수입에 임대할 수 있는 곳은 없다. 아들은 “아빠가 전에 있던 아파트를 팔아서 그래”라고 날 원망했고 아내는 “하지 말라는 비지니스를 해서 그래”라고 날 원망했다. 지금 내가 스트로크(뇌경색)으로 아파서 일정부 지원을 신청한 상태인데 일을 못 하니 모든 원망이 내게 돌아왔다.





빌린 둥지에 비가 올까? 바람이 불까? 아침저녁으로 기도하며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기도하지만, 세상 바람은 비켜 가지 않고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산불처럼 준비도 없는 사람들에게 갑자기 칼을 들이민다. 넌 재수 없는 사람이니 아무것도 하지 마. 아무것도 안 했는데 갑자기 찾아온 엘리베이터 사고로 아파서 일을 못하고 수입이 없으니 가장으로 아버지로 늘 미안한데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아픈 몸을 이끌고 뭔가를 해 보려 하지만 자꾸만 뒤뚱대는 걸음마다 날개 다친 새처럼 퍼덕거린다. 세월이 쌓일 때마다 살림도 늘어 이민 가방 4개 달랑 들고 온 짐들이 구석마다 켜켜이 쌓여 있다. 아파트 매니저가 신발장도 버리고 화장실 선반도 버리고 부엌에 싱크대 밑 서랍장 물건도 버리고 창가에 일 미터 안에 아무것도 두지 말라고 하고 베란다 발도 새 걸로 바꾸라고 했다며 화살 맞은 새처럼, 칼 맞은 사슴처럼 놀라 말하는 아들 앞에 가뜩이나 힘이 없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온다. 지원금을 받기 위해 매니저에게 사인받은 후 우리 사정을 알고 쫓아내려는 것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는데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작가의 변

석 보원 스님의 사진에 폐지 줍는 할머니 사진을 보고 바로 든 생각이 삶의 무게였다.
그제 죽은 비둘기를 부리로 쪼며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까마귀를 보며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제 아파트 입구 잔디밭에 토끼 목을 파먹은 사체를 보았다. 토끼는 풀 뜯어 먹고 사는 초식동물이고 까마귀는 아무거나 다 먹는 잡식 동물이니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 새끼 토끼를 노리고 계속 쪼려고 쫓아 다니는 까마귀들을 보는 것은 낯선 풍경이 절대 아니다. 먹이 사슬에 의해 이루어지는 자연스러운 현상인 게다. 사람들은 때로 내가 약하다는 생각이 들 때 약자에 나를 투영하여 더욱 슬픔에 빠지게 되는 것 같다. 동병상련이란 말처럼.

사람 사는 인간사에도 늘 초식동물 같은 민초가 있고 잡식성으로 돈이 되는 것은 뭐든 먹어 치우는 인간도 많이 있다. 과자 한 봉지보다도 가벼운 영혼의 말에 따라 양심에 따라 움직인 다지만 그 가벼운 영혼을 송두리째 잊고 사는 몸뚱이들도 상당히 많다. 생각이란 걸 하지 않고 본능으로만 살면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니 순간적으론 정말 행복한 것이 아닐까 한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무거운 손수레에 폐지를 잔뜩 싣고 언덕을 오르는 노인은 영화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단골 레퍼토리이지만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단면이 아닐까. 그만큼 노인 복지가 넉넉하지 않다는 것과 의지대로 무언가를 열심히 할 수 있다는 양면이 존재한다. 나의 아버지 삶의 무게는 무엇이었을까? 어깨에 걸머지었던 지게였을까? 늦게라도 자식을 봐서 노년을 좀 더 편안하게 보내려 했는데 홀딱 외국으로 튀어 버린 아들이 삶의 무게로 짓누른 적은 없었을까? 태어나면서부터 도련님, 아씨로 불리면서 태어나는 금수저처럼 일반인들이 평생을 벌어도 벌 수 없는 재산이 어쩌면 그들에게는 삶의 무게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마이너스통장은 늘 꽉 차서 더 이상 곶감 빼 쓰듯 쓸 돈도 없는데 코비드라는 전염병은 어디에 취직을 못 하게 하고 어디 돈 나올 구멍도 없을 때 그 막막함처럼 우리에게 막다른 골목을 선물하는 그런 것이 삶의 무게가 아닐까? 저마다 적든 많든, 무겁던 가볍던 삶의 무게를 한 개씩 지고 삶을 살아간다. 물동이를 인 아낙처럼, 지게를 진 농부처럼.

아파트 매니저가 한바탕 휘젓고 지나간 후 대책을 세우며 주 정부 임대차중재위원회에 제소할까, 인권위원위에 제소할까 하다가 어떤 것도 하지 못했다. 결국 내가 던진 돌이 나에게 돌아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식구들이 만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여라도 이사 갈 방법은 있을까 하고 크레그리스트라는 교차로 같은 웹사이트를 찾아보니 방 하나에 한 달 임대료가 2,000불이다. 그것도 주택 지하나 반지하다. 아내는 처음 이민왔을 때도 캐나다까지 와서 반지하에 살아야 하겠냐고 말했었다. 그런데 방 2개는 2,000불에서 3,000불을 넘는 것도 있고 3 베드 룸은 한 달에 6,000불을 넘기는 것도 있다. 한국 돈으로 한 달에 600만 원이다.

전에도 신청했던 비씨 하우징에 신청서를 냈다. 그런데 조건이 25살 이상의 자녀는 동거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아파서 정부 지원금을 받는 경우를 제외하고 가족이 함께 살 수 없는 것이다. 혹시나 하고 신청하니 1베드룸만 신청할 수 있다. 즉 아내와 나만 들어갈 수 있다.

그래도 신청서를 작성했는데 다음 날 바로 우편물이 왔다. 첨부 서류를 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내에게 말을 했더니 아내가 말도 안 된다고 말했다. 아이들을 두고 어딜 가냐고 하면서 가려면 혼자 가라고 말했다. 그래도 딸과 아들하고 상의하려고 했더니 말만 해봐하고 겁을 준다.

그리고 저녁에 딸에게 말을 하니 딸은 이미 알고 있었다. 찾아봤다면서 방법이 그것밖에 없으면 그렇게 해야지 어떻게 하겠냐고 했다. 아내가 절대 안 된다면서 가려면 너 혼자 가라고 했다. 나도 식구가 뿔뿔이 흩어지는 것은 싫다. 하지만 아파트 매니저가 정말 우릴 쫓아낸다면 우리는 갈 곳이 없다. 우리 수입에 임대할 수 있는 곳은 없다. 아들은 “아빠가 전에 있던 아파트를 팔아서 그래”라고 날 원망했고 아내는 “하지 말라는 비지니스를 해서 그래”라고 날 원망했다. 지금 내가 스트로크(뇌경색)으로 아파서 일정부 지원을 신청한 상태인데 일을 못 하니 모든 원망이 내게 돌아왔다.

열심히 일하고도 아프고 병 드니 그동안 가족을 부양한 공은 다 사라지고 지난 일들이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나를 원망한다. 그렇다고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고 앞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보니 비씨 하우징에 들어가 우리라도 아이들의 짐이 안 되어야 한다는 생각인데, 엄마인 아내는 3베드룸을 신청하라고 했더니 1베드룸 신청했다면서 그러면 나와 같이 안 산다고 아이들하고 산다고 한다. 3베드룸을 신청해서 함께 살고 싶지만, 법이 그렇다는데 나는 어떻게 하냐고 했더니, 혼자 가라고 말한다. 모든 것이 멈춤 것 같다. 길거리에 노숙자가 자꾸만 교차한다. 알버타주나 사스케치완주는 밴쿠버보다는 주택 가격도 임대료도 좀 형편이 나은 편이다. 하지만 아내는 거기 추워서 가기 싫다고 한다. 나도 추운데 싫다. 방법이 없다면 그렇게라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몸이 건강하고 직장이 있을 때는 뭐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몸이 병들어 일을 못 하니 뭐든 자신 없다. 거기다 가족에게서도 쓸모없는 폐품처럼 버림받는 느낌이다. 가족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함께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것이 맞다. 하지만 부모가 되어 자녀들에게 부담이 되는 것도 싫다. 물론 자녀의 비빌 언덕이 되고 든든한 힘이 되어 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니 짐이 되지는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돈 있고 능력 있는 부모여야 부모라는 말도 안 되는 가설에 할 말은 없지만 어찌 되었든 사람은 세상에 나올 때 부모님의 은덕으로 세상을 나오게 되었지만 혼자 살아가고 혼자 떠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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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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