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바퀴 더 도는 사람들
한 바퀴 더 도는 사람들
  • 김경호 지지협동조합 이사장
  • 승인 2018.01.30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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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호] 청불회 회장 취임법회를 보며
▲ 하승창 청와대 불자회장.ⓒ불교닷컴

<민왕(閩王)이 약사도량(藥師道場)을 크게 세우고 여러 장로스님들을 모셔 염불을 청했다.
다른 스님들은 모두 염불을 하는데 나산(羅山)선사는 가만히 자리에 앉아있었다.
이를 본 고산(鼓山)스님이 나산선사에게 넌지시 말했다.
“대왕이 도량으로 청했거늘 어째서 돌면서 인연을 맺지 않으시오?”
선사가 도리어 고산스님에게 물었다.
“대사는 몇 번이나 돌았소?”
고산스님이 대답했다.
“마흔 아홉 차례 돌았소”
선사가 다시 말했다.
“다시 한 번 더 돌아야 대왕과 인연을 맺지 않겠소?”
이 말을 듣고 고산스님은 대답하지 못했다.>

<선문염송> 제1201칙 단좌(端坐)라는 화두입니다.
이 화두의 주인공인 나산도한(羅山道閑) 선사는 암두전활(岩頭全豁, 828-887 )스님의 제자로 당나라가 망한 뒤 우후죽순처럼 일어난 5대10국 시대의 스님입니다. 여기 등장하는 민나라는 복건성의 절도사 왕심지가 지역을 장악하고 909년 건국한 나라로 945년에 멸망하였으니 스님의 시대도 이때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화두의 제목인 단좌(端坐)라는 말은 ‘곧게 앉았다’는 뜻입니다. 곧다 혹은 바르다는 뜻이니 굽거나 기울어지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곧게 앉아야 한다’라는 당위는 그렇지 못한 현실과 대비되어 더욱 큰 울림을 줍니다.

매서운 추위가 잠시 주춤한 1월 30일, 그래도 여전히 영하의 날씨입니다. 조계사 앞에는 다른 날보다 조금 일찍 시위에 나선 불교 닷컴과 불교포커스 기자들이 있었습니다. 보통 오후 1시에 시작하여 점심시간에 오가는 인파에게 호소하였는데 이날은 11시로 당긴 이유가 있습니다. 그 시간에 조계사 대웅전에서 청불회 회장 취임 법회가 열렸기 때문입니다.

청불회란 ‘청와대 불자회’의 약자입니다. 관행적으로 수석비서관 급에서 회장을 맡습니다. 대개 새 정부가 출범하면 바로 불자회가 조직되곤 했는데 이번 문재인정부에서는 불자회 구성이 많이 늦어졌습니다. 회장을 맡을 사람이 마땅치 않아서 그랬다는 말이 있었는데 확인된 것은 아닙니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조계사 대웅전은 사람들로 빼곡했습니다. 방송카메라도 여럿 보였습니다. 권력의 핵심 청와대 인사들을 불자회로 엮었으니 앞으로 좋은 관계로 발전시키려는 뜻이겠지요. 총무원장 스님 이하 종단의 주요 인사들과 종단협 여러 스님들의 붉고 누런 가사들. 그리고 신도들이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불청객이었습니다. 대웅전 앞마당까지는 걸어 들어갔습니다만 평소 자주 보던 총무원 종무원이 경내에서 퇴거하기를 요구했습니다. 일주문 앞에서 시위하는 이들과 한패라는 이유입니다. 좋은 날이라는데 싸울 일이 있나요. 청법가 소리를 뒤로하고 물러섰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거룩한 법문이 있었는지 끝내 알 수 없었습니다.  

도량은 부처님이 계신 청정한 불국정토입니다. 하지만 그저 건물과 불상을 모신다고 해서 그 공간이 정토가 되지는 않습니다. 공간에 맞는 실천이 있을 때 비로소 정토세상으로 거듭납니다. 법요의식(法要儀式)을 하는 뜻이 그것입니다. 삿된 기운을 몰아내어 주변을 깨끗이 정화하고 그리하여 성스러운 힘이 이곳 도량에 찾아들기를 기원 드립니다.

<약사경>에서는 ‘약사여래를 예배공양하고, 49번 이 경전을 독송하고 49개의 등을 밝히고...’라고 기도하는 법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민왕의 약사도량 준공식에서도 스님들은 도량을 49번 돌며 민왕과 일체 중생의 복덕을 기원하였겠지요. 그럼으로써 참으로 훌륭한 보시를 한 민왕을 격려하고 참석한 대중들에게 기쁨을 주었을 것입니다. 도량을 청정하게 하는 소리와 부처님에 대한 예경의식을 통해 약사도량은 이 세상의 번뇌와 고통이 소멸한 청정한 불국정토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참석한 스님 모두가 열심히 의식을 올리는 가운데 나산 선사만이 홀로 멀뚱히 앉아 있었습니다. 고약한 일이지요. 스님이라면 모름지기 중생들의 소망하는 바를 성심껏 받아들여서 행해야 하는 것이 도리일진데 어째서 저럴까요? 분위기를 망치는 것을 보다 못한 고산 스님이 넌지시 나산 선사에게 충고했습니다.
“대왕이 도량으로 청했거늘 어째서 돌면서 인연을 맺지 않으시오?”
오늘의 언어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청와대 수석을 불자회장으로 청했으니 인연을 맺지 않으시겠소?”
그런 점에서 일주문 앞에서 시위하는 이들은 좋은 분위기를 망치는 마구니일 것입니다.

그러나, 촛불혁명으로 만들어낸 민주정부의 참모들이 언론을 탄압하는 조계사에서 취임법회를 여는 것은 참 아이러니입니다. 취재를 허용하라는 법원판결조차 무시하는 비민주적 불법집단이 민주정부의 권력 실세들에게 줄을 대보겠다고 알랑거리는 것은 비극입니다. 제가 조계사 대웅전에서 본 것은 마흔아홉번으로 모자라서 한 바퀴를 더 돌고자 아우성치는 사람들의 뒷태입니다. 한 바퀴만이 아니라 필요하다면 백 바퀴 천 바퀴라도 마다하지 않을 사람들입니다.

두어 시간 추위에 꽁꽁 얼고 난 뒤에야 겨우 행사를 마치고 경내를 나서는 청불회 인사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회장으로 취임한 하승창 사회혁신수석비서관은 경내를 나서다 말고 피켓을 든 이들에게 다가와 참여불교 재가연대의 조재현 총장과 악수를 나누었습니다. 그 순간, 총무원의 모 종무원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습니다. 마치 무척 급한 일이 있는 양 하수석을 차로 안내하는 바람에 한 마디의 대화도 나누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급하게 출발하는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뒷차를 기다리느라 한참을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벼운 악수와 대화조차도 두려울만큼 잘못이 많아서일까요? 이날 행사 말미를 장식한 해프닝이었습니다.

고산스님은 예법에 맞게 마흔아홉번을 돌았겠지만 권력에 아부하지 않고 바른 자세로 자리에 앉은 나산선사의 단좌(端坐)가 불가(佛家)의 참된 예법이 아닐까 다시 생각해봅니다.

오늘 우리 한국불교는 곧게 앉아 있습니까?

[불교중심 불교닷컴. 이 기사에 대한 반론 및 기사제보 mytrea7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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