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호! 향일암
오호! 향일암
  • 이기표 원장
  • 승인 2009.12.24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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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표의세상이야기]
화재 전 향일암 모습
(여수=연합뉴스) 국내 대표적 해맞이 명소로 유명한 전남 여수 향일암(전남도문화재 자료 40호)에서 20일 새벽 불이 나 대웅전과 문화재 등이 모두 불에 탔다. 맨 위 사진과 왼쪽 사진은 화재 전 향일암의 모습으로 가운데 대웅전이 금 단청으로 단장돼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이날 불로 대웅전(51㎡)과 종무실(27㎡), 종각(16.5㎡) 등 사찰 건물 8동 가운데 3동이 전소됐으며 각 건물은 서로 가깝게 위치해 강풍으로 쉽게 불이 옮겨 붙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맨 위사진, 오른쪽 사진 여수신문 제공>> 2009.12.20minu21@yna.co.kr

나의 유년시절은 ‘궁핍’이었다. 경상남도 남해, 지금은 육지와 연결된 다리가 걸쳐져 큼직한 산업시설도 들어오고, 사시사철 관광객의 발길도 끊이지 않았다. 내 유년의 남해는 절해고도였고 궁핍의 땅이었다. 그 외로운 섬에 발붙여 사는 사람들 중에서도 하필이면 나의 아버지가 가장 가난했다. 국민학교(초등학교의 전신)에 입학하면서부터 이웃집 고깃배를 타고 잔심부름을 해 줘야 간신히 학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것 말고는 돈벌이가 없었다.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 나는 날마다 그처럼 궁핍한 섬을 탈출하는 꿈만 꾸었다. 그곳에는 희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일자리를 찾아 육지로 뛰쳐나왔다. 그러나 빈손으로 희망을 찾아 나선 육지생활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부닥치는 대로 고난이었고 좌절이었다.

돈을 벌어 공부를 하겠다고 고향을 떴지만 현실은 한 입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몇 달간 일을 해주고도 돈 한 푼 받지 못할 때가 허다했다. 그럴 때마다 다른 일자리를 구할 때까지 밥을 굶어야 했다. 오갈 데 없는 객지에서 끼니조차 굶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 서글픈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망막한 것은 공부를 하겠다는 꿈을 펼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향일암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도 그 무렵이다. 일자리를 찾아 여수에 갔었고, 고깃배라도 타야겠다는 생각으로 이리저리 헤매다 닿은 곳이 돌산항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얼마를 지내는 동안 마음이 외롭고 서러울 때마다 찾아간 곳이 향일암이었던 것이다.

신 새벽에 돌산항을 출발하여 향일암으로 가는 길은 풋풋해서 좋았다. 먼 옛날 원효스님이 걸어갔을 길섶으로는 이슬 젖은 갓나물 냄새에 코가 아리고, 캄캄한 새벽바다를 밀어붙이는 파도소리는 방황하는 청년의 번뇌를 씻어내기에 그만이었다.

그렇게 모퉁이를 돌아서면 향일암의 새벽염불소리가 길손을 맞아주곤 했다. 산문을 비집고 올라가 턱을 고인 채 기다렸다 맞이하는 향일암의 일출은 참으로 웅장했다. 해가 솟기 직전의 드넓은 바다가 산고를 겪듯 용틀임을 하며 핏빛으로 변해갈 때의 눈부심은 아름다움을 넘어 경이로움 그 자체다. 그리고 바다를 이글거리며 솟아오르는 시뻘건 불덩이는 좌절과 서러움에 젖어있던 나의 가슴을 뽀송뽀송하게 말려주곤 했던 것이다.

이런 감정이 어찌 나 하나뿐이랴, 정월 초하루 새해맞이 말고도 향일암의 일출을 가슴에 담기 위해 찾아오는 이들이 연간 60만에 이른다고 한다. 해맞이 명소야 수도 없이 많지만 남해의 구석진 그곳까지 발길을 하는 이유는 고즈넉한 산사의 배경이 갖는 조화의 극치일 것이다. 해가 떠오를 때 눈부시게 반짝이는 산사의 풍광까지 함께 아우를 수 있는 절경이니 말이다.

다시없는 한 폭의 절경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오던 향일암이 하룻밤사이에 잿더미로 변했다. 문화재적 가치를 떠나 수많은 사람들이 꿈과 희망을 부풀리며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던 향일암의 소실은 많은 이들의 추억까지를 불태워버린 꼴이다.

그들에게 얼마나 미안한 일이랴. 그 상실감이 얼마나 컸으면 화재소식을 들은 지인이 새벽에 전화를 걸어왔다. '어떻게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 하나 지키는 사람이 없었으며 그렇게 무방비로 법당을 불태우는 이들이 무슨 스님이냐'는 힐난이다. 치도곤을 맞아 싸다.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방한암 선사께서는 6.25전쟁의 와중에서 목숨을 던져 상원사를 구하지 않았는가. 산중의 사찰이 적군의 은신처가 된다고 불태우려는 군인에게 “절을 태우려면 나부터 태우라”며 법당에 드러누우셨던 한암선사나, 죽음을 무릅쓰고 해인사 폭격명령을 거부한 전투기 조종사가 있지 않은가. 하물며 최첨단 방제시스템이 널려버린 시대에 무방비로 소실되는 법당이 하나 둘이 아니다.

스님은 절을 지켜야 한다는 소임에 게으른 때문 아닌가. 이처럼 소임에 게으른 사찰에 대해서는 종단차원의 엄중한 경책이 있어야 할 것이다.

 

   

1956년 남해에서 태어난 그는 불교방송 부산사업소장, 진여원불교대학 학장을 거쳐 부산보현의집 원장을 맡고 있다. 부산노숙자쉼터 협의회 회장을 비롯해 독거노인을 위한 무료급식 등 봉사활동을 펴고 있다. 한국문인협회 회원, Fact 포럼 대표, 한국전력공사 이사를 맡고 있다. 저서로는 <제로에서 시작하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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