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초안)
- 21세기 아쇼카 선언-에 대한 문제제기
불기2555(2011)년 8월 24일
이 문건은 8월 24일 ‘화쟁위원회’에 정식 문제제기 했습니다.
法應 <불교사회정책연구소> 017-252-2459
귀의 삼보하옵고.
소납은 지난 7월 21일 ‘제7차 종책토론회 종교평화를 위한 불교의 입장’ 이라는 이번 선언과 관련한 비공개 토론회에서 이 선언문의 내용에 대해 많은 문제제기를 강하게 했습니다.
문제제기의 내용의 수용 여부는 주최 측의 판단일 것이나 그냥 지나치기에는 문제의 심각성이 크기에 공식 건의합니다.
편의상 전체 내용의 원문을 전개하면서 문제되는 부분을 그 밑에 의견을 진한글씨로 기재 합니다. 이 문제 제기는 심각성으로 인한 급한 마음에 우선 1차 제기 하는 바 일부 거친 부분이 있음을 양지 바랍니다.
부디 제기한 문제가 참고가 되어서 우리 불교계가 주도하는 일에 긍정적 성과를 기대합니다.
문제제기 내용
1. 총평
다종교 사회에서 다른 종교가 타종교 자체를 인정하고 상호 이해의 노력으로 국민의 정신세계를 잘 향도하고 사회를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야 한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다.
지난 23일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에 대해
조계종 “다른 종교 개종하려는 포교 않겠다” - 동아일보
조계종 “이웃 종교에도 진리 있음을 인정한다” - 크리스천투데이
“요즘엔 세상이 종교를 걱정해” - 중앙일보
보도를 내 보내고 있어 나름대로 관심을 이끄는 데는 성공을 했다.
그러나 이 선언문을 보면 아무리 검증을 위한 초안이라 해도 상대 종교의 교리 자체를 인정 즉 창조의 세계관을 인정하고 연기법을 부정하는 인상의 내용으로 자칫 아무종교나 믿어도 되며, 불교의 포교를 무력화 하고 불교인으로서의 신심의 자부심을 뭉개는 내용이 다분히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종교 사회에서의 갈등의 해결은 그 종교 자체의 인정과 교류와 이해를 통한 다분히 외형적이고 물리적인 것이어야지, 내면세계의 교리자체까지도 지나칠 정도로 긍정하는 화학적인 것을 거론 시 불교에 대한 중대한 오해와 오류 그리고 자신의 종교에 대한 폄훼로 까지 발전되어서 승려는 물론 불자들을 혼돈케 할 여지가 충분하다.
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 창조주의 세계관도 하나의 무명에 불과한 것이며 번뇌라는 규정이 가능하다.
하여 금강경에 ‘무유정법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 즉 ‘깨달음이라고 정한 법 자체도 없음’을 주장하는데 종교 갈등의 중심인 기독교의 창조자를 긍정하는 내용의 선언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도 맞지 않다.
‘선언’은 무엇을 인정하고 지나칠 것 인지에 대한 고도의 노력이 필요함에도 전여 그러한 노력을 읽기 어렵다.
또한 조계종이 종단차원의 선언을 할 시는 최종 원로와 중진 대덕의 인증을 받고 그 내용을 세심히 검증해서 추호의 하자가 없도록 해야 하며, 불교의 관용과 자비 등 위대한 세계관이 오해 없이 잘 전달되고 인류의 상생과 화합에 진정으로 기여 할 내용인지 여부를 검증해야만 한다.
일방적인 짝사랑의 의미 전달이어서도 안 되며, 종교의 현실 역시 힘이 없는 종교나 주장이 무력화됨을 알아야 한다. 아소카 왕은 부왕이 죽자 형을 살해하고 주변국을 전쟁으로 살육의 장으로 한 다음 참회하고 아소카 선언을 했다. 그 선언에 반하거나 저항할 주변국은 이미 없었다. 정치적인 면도 있었다고 볼 여지도 있으며, 그는 이미 강력한 전승자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선언이 선언으로 그칠 가능성도 큰 우려다. 이를 활성화 하려면 타 종교계가 적극적인 자세로 동참을 해야 하는데 과연 그러할 것인지도 의문으로 사전 준비가 필요한 것이다. 자칫 불교계가 현실에서 밀리니 대자비심을 보인 것으로 약자의 자세라는 오해받을 여지도 다분하기에 더 우려된다.
구성역시 전체적으로 내용이 길어 혼란스럽고 타 종교를 인정하고 상생하자는 지나친 의도에서 불교의 교리도 진리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대 오류를 범하고 있다.
2. 세부지적 (전체 내용을 제시하면서 중요 부분의 지적한다. 박스 안은 선언문 원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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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대목은 결국 연기관을 우주와 삼라만상의 관점에서 성주괴공, 사물과 사물의 관계, 마음의 작용이나 장과 단, 유와 무, 미와 추가 아닌 이 종교(불교)가 있기에 저 종교(기독교나 타종교)가 있다는 의미를 설명하려하고 있다. 실제 다음에 이어지는 문장이 그러하다.
- 인류가 유사 이래 창조한 종교나 사상을 현실에서 부정 할 수는 없다. 그렇다 하여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을 인간이 창조한 온갖 사상에 대입해서 해석하고 관계성을 부여한다면, 자유민주주의가 있기에 독재가 있고, 독재가 있기에 자유민주주의가 있다는 등식의 성립이 가능하고 이는 악을 합리화 시키는 중대한 오류를 범하며, 범하게 하는 원인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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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 불교와 종교 갈등의 대표적 종교인 기독교계와의 중대한 차이는 절대적 신 즉 창조주의 인정 또는 불인정이냐다. 즉 ‘불변고정’이냐 ‘무상’이냐 하는 절대 융섭할 수 없는 괴리다. 아울러 창조주를 거울삼아 제행무상을 이해하자는 것인지, 타 종교인에게는 제행무상을 거울삼아서 창조주를 더 인정하라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문장이다.
- [‘이웃’에 있는 나 자신의 종교이며, 내 종교를 비추고 있는 거울입니다.]라 할 때, 다종교 사회에서의 종교 현실의 현상을 넘어서 내면의 세계관이 결국 창조론이나 연기관이 다 하나라는 인정으로 창조론 속에 연기관이, 연기관 속에 창조론이 성립한다는 이해가 어려운 주장이다.
[나의 종교가 우주 전체를 담고 있듯이 상대의 종교 또한 우주 전체를 담고 있습니다.] 연기관과 창조론을 혼돈케 하는 대표적 문장이다. 결국 불교와 기독교를 동일선상에 보고 있다는 결론이 가능하며 이는 연기론적 우주관과 일체유심조를 폄훼하는 문장으로 충분하다.
- 승려와 목사나 신부가 순수한 인간 대 인간 즉 ‘한 물건(有一物)’로서는 연기적 관계가 가능하나, 그들의 세계관이 충돌 할 때 연기론적 이해는 가당치가 않다
- 어느 종교를 믿고 살다죽으나, 어떻게 살든지 간에 죽는 것은 다 동일하다는 식의 주장으로 해석이 가능하기에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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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자의 다른 인연이 만들어내는 다양성은 ‘있는 그대로’ 세계의 실상이며] 나와 다른 종교와 사상을 이해하는 관점, 광대무변한 마음의 세계를 이해 할 때 별 무리가 없는 듯 하지만...
- 그러나 이는 종교의 세계를 넘어서 살인 등 범죄, 일본의 옴 진리교 등 신비주의에 의한 광신교 등을 인정 가능하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선과 악, 다름이 존재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 할 때 선의 무력증, 인류가 추구해야하는 보편적 가치로서 인권, 복지, 환경마저도 불필요 한 것이며, 모든 파괴의 자행마저도 있는 그대로의 실상으로 합리화 내지 미화가 가능하다. 매우 우려스런 대목이며 발상자체가 의심스럽다. ‘백백교’도 인정하자는 주장으로 이해가 가능하다.
- ‘우주의 전개나 사물과 사물의 융섭’이 아닌 인간이 만든 특정 종교나 사상을 실제의 현상에 대입하는 오류는 무심도인들의 세계가 아니면 거론치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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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 지적 한바, 아소카 왕은 부왕이 죽자 형을 살해하고 왕위에 등극하여서 주변국을 전쟁으로 살육의 장으로 한 다음 참회하고 아소카 선언을 했다. 그 선언에 반하거나 저항할 주변국은 이미 없었다. 왜 그는 이미 강력한 전승자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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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가 무엇인가를 주장하려면 지난시절의 역사나 현실을 부정할 필요는 없으나 완벽해야 한다. 그러하기에 부처님도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은 답 하지 않으신 거라는 생각이다.
- 아소카 왕의 관점에서 볼 때 참회하고 선을 베풀어서 모든 것이 다 해결된다면, 우리는 당장의 현실에서 살육의 독재자도 인정해야한다는 결론이 가능하다. 설사 그러한 것이 진리에 맞다 해도 공개 선언할 일은 아니다. 아소카 왕이 재임시 불교의 포교와 통치 역시 강력한 정보통제 정치에 기인했음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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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대목은 예로 과거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우산리의 천진암에서 관군에 쫓긴 천주교인들을 숨겨주고 그들에게 강학의 장소를 제공해서 ‘이웃’이상으로 대한 스님들을 욕보이는 문장으로 충분하다.
- [이웃종교를 진정으로 ‘이웃’으로 생각하는데 충분하지 못했으며 이웃종교인의 허물을 내 허물로 여기고 그들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여기는데 충분하지 못했음을 반성합니다.] 생각만으로는 죄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 이는 현행법도 그러하고 부처님도 마음으로 단지 생각만은 죄가 안 된다 했다. 그것이 행동으로 표출될 때 문제다. 마치 불교가 승려들이 기독교나 타 종교를 생각으로라도 배척 했다는 의미로 해석되며, 또한 그들을 우리 불교계나 승려개개인이 지나치게 ‘이웃'으로 여길 이유가 무엇인지도 의문이다.
- 문장 작성자는 그러한지 모르나 그러하지 않은 대다수의 승려들을 모독하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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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와 이웃종교로 대변되는 기독교에 대해 ‘불교도 진리중 하나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깡그리 무시하는, 스스로가 진리가 아니라는’ 심하게 말해 ‘해종행위’의 문장이라 까지 할 수 있다.
- 이 대목에서 ‘진리’는 모든 종교가 보편적 가치로 추구하는 자비, 사랑, 박애, 헌신, 보살행, 나눔 등의 ‘지말무명’적인 것이 아니라 생사관으로서 ‘근본무명’에 관한 것일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하며, 지나친 표현이다.
- [종교가 다른 것은 서로의 진리가 달라서가 아니라 진리를 표현하는 언어와 문법이 다를 뿐입니다.] 즉 이 문장은 연기적 세계관, 사성제, 무아, 삼세인과론 등 부처님의 가르침이 기독교의 세계관인 ‘창조론’과 단어만 상이하지 내용적으로 같다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진다.
- 현 기독교 학자들은 불교의 연기법, 사성제 등을 성경에 대입하여 불교를 무력화 시키고 있다. 우주의 변화를 불교적 제행무상관에서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섭리운운 한다.
- 승려의 입장에서 타 종교에도 진리가 있다라 대 놓고서 종단 차원에서의 선언은 불교를 부정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단지 타 종교의 사회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지말무명’의 해결에 대한 노력은 높이 평가할 수 있다고 본다.
이웃 종교와 우리는 경쟁적 관계가 아닙니다. 진리를 향한 동반적 관계이며 이웃종교의 장점을 통해 내 종교의 부족함을 채우는 상호보완적 관계입니다. 그리고 사회적 공동선을 실현하기 위한 동지적 관계입니다. 서로의 차이와 다름을 존중할 때 공통점이 더욱 빛나 보이며 모두 진리를 향한 동반자라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상호존중의 호혜성은 종교다양성을 실천하는 최소한의 원칙입니다. 이 원칙은 다종교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불교인이 지켜야 할 또 하나의 정법입니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하되 타인의 잘못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개선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진정한 정법수호의 정신입니다.
(2) 종교다양성의 존중
내 종교가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의 종교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이웃종교에 대한 인정과 관용이라는 소극적 차원을 넘어 그들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 배우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 종교간 평화, 상생을 부정할 자는 없다. 그러나 [이웃종교에 대한 인정과 관용이라는 소극적 차원을 넘어 그들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 배우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라는 문장은 종단 기구가 승려들을 향해서 기독교를 배우라는 의미로 해석이 충분하다. 중대한 오류라는 생각이다.
-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하되 타인의 잘못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개선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진정한 정법수호의 정신입니다.] 별안간 튀어나온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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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이 대목은 무명에서 허덕이거나, 그릇된 종교관이나 사상을 가진 자들을 바른 길로 인도를 포기하는 즉 불교의 포교를 포기하는 선언과 다름이 없다.
- [믿음을 전하는 일은 곧 자신의 믿음을 다듬어 나가는 과정이요, 서로 다른 믿음을 지닌 이들과 어우러지면서 큰 조화를 이루어 나가는 과정입니다.] 불교에 대한 무지한 문장이다. 불교에서 ‘신(信)의 의미는 수행을 하면,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하면 성불을 한다는 확신의 의미다. 혹 불교의 믿음(信)을 타종교인의 사실상 절대적 믿음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 불교의 ‘믿음’에 대해 말을 할 때는 신해행증(信解行證)의 입장을 기본으로 해서 거론돼야 마땅하다.
- [전법은 다른 종교인을 개종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행복과 안녕’을 실현하는데 그 궁극적 목적이 있습니다.]라 한바 이는 ‘전법’의 의미를 불과 몇 사람이 규정하는 대 오류를 범하며, 설사 전법이 개종이 아닌 불교를 이해시킴에 한주 하고 개종여부는 당사자의 의견이라 할지라도 ‘전법의 의미를 제한’하여 스님과 포교사들로 하여금 혼돈을 자초하고 이해에 따라서는 불교는 타 종교인의 개종을 시키지 말라는 의미로 까지 확대가 가능하다. 어떠한 의도에서 작성된 문자인지 이해가 안 된다.
- 석가모니부처님이 당시에 개종을 강요하지 않은 것은 부처님만이 가능한 일이며, 현 시대에 구태여 필요하다면 이러한 결정은 ‘종정예하’만이 가능하며 합의가 필요하다. 아니 구태여 거론할 필요가 없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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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께서는 올바른 가르침을 판별하는 기준의 하나로 ‘사람’이 아닌 ‘법’에 의지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법’은 부처님의 가르침의 내용을 의미한다. 결국 종교 간의 갈등은 ‘법’인 ‘자신의 종교철학에 기인’함을 알아야한다. 사람으로서 종교인의 몸과 입을 빌어서 말이다.
- 되레 선언문 작성이 ‘법’이 아닌 사람에 의해 작성되었다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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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분들이 진리는 하나며 마치 등산 시 산정을 향하는 목적은 하나라 한다. 언어의 희롱이다. 산의 정상에 ‘무아’와 ‘무상’이 있는 산인지, ‘창조적 하나님의 십자가’가 있는 산인지는 분명 다르다. 종단 적 차원에서의 발표는 심중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소중히 여기는 만큼 이웃종교의 가르침도 소중하게 여기겠습니다. 내 종교의 관점과 언어로 이웃종교를 판단하지 않겠습니다. 그들의 입장과 언어로 그들의 종교를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기독교식의 ‘기도’가 불교 내부에 판치고 있다. 가히 ‘종교문화사회주의’라 할 것이다. 불교가 삼투압 현상으로 타종교에 빨려 들어간다는 생각이며 현실이다. 위험한 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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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끝내며
급한 마음에 우선 정리를 했습니다. 이 선언의 문제는 결국 조계종을 대표하는 선언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선언을 준비한 분들의 노고와 필요성은 인정하나, 조계종을 대표해서 나가는 모든 선언은 단어하나, 점 하나까지도 조심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 지나친 표현도 있음을 인정하고 애종심으로 이해 바랍니다.
지난번 비공개 토론회에서 여러 문제를 지적했으며, 당시 자리를 같이한 다른 토론자들도 많은 부분을 동의 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교정하거나 좀 더 전문적인 불교계 인사들로 하여금 검증하고 중진 대덕의 동의를 받아야 마땅한 사안입니다. 이것이 종평위나 화쟁위가 대표적으로 하는 사안이나, 종단을 넘어 범 불교계의 일임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 이 선언을 타종교계에서 악용할 여지가 있습니다. 이를 간과해선 안 됩니다. 불교의 다양한 방편 중에 적용할 바를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발표문을 공개해서 대중적으로 건의나 문제제기를 하라는 것이 열린 자세인지는 모르나 언론을 통해 한번 나간 것은 회수가 불가능 하며, 책임을 전가하기 위한 수단으로도 비추어 질수도 있음이 염려 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