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상록’ 뒷면에 강화 무기 배치 현황이…
‘팔상록’ 뒷면에 강화 무기 배치 현황이…
  • 조현성
  • 승인 2012.09.11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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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 불교학술원, ‘병인양요’ 관련 자료 발굴

1866년 병인양요 당시 강화군 내 무기 및 물자 현황을 알려주는 자료가 부처님 일대기를 다룬 <팔상록> 뒷면에서 발견됐다.

동국대 불교학술원(원장 인환)은 11일 본관 로터스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불교기록문화유산아카이브(ABC) 사업 수행 중 평창 지암정사(주지 대석) 소장 170책을 조사하던 중 1854년 필사된 언해본 <팔상록>(1ㆍ4책본) 이면에 군수물자 내역을 담은 관문서가 정연한 글씨체로 적혀 있었다”고 발표했다.

평창 지암정사는 조계종 총무원장 등을 역임했던 이종욱 스님의 손상좌 대석 스님이 주지로 있는 사찰로 이 책들은 이종욱 스님이 소장하던 것들이다.

▲ 평창 지암정사 소장 '팔상록' 이면에 쓰인 '강화군기수목'

동국대가 발견한 관문서는 ‘강화부 부상각진보상각돈대상 각양군기잡물수목(江華府 府上各鎭堡上各墩臺上 各樣軍器雜物數目, 이하 강화군기수목)’으로 1854년 2월 13일 현재, 강화부 각 진보 및 돈대 등 각종 군기 현황을 강화유수 책임 아래 정리한 것이다.

문서에는 화약 소총 장총 활ㆍ화살 궁노(기계활) 불랑기(대포) 등 종류별 수량이 적혀 있고, 전등사 등 강화군내 사찰과 암자의 솥 개수도 파악돼 있다. 이에 의하면 당시 강화부 전체의 보유 화약은 모두 6만 6천 400여근에 달하는 막대한 양이었다.

노영구 교수(국방대학원)는 “강화군기수목을 통해 19세기 중반 병인양요 직전 강화부의 방어 태세 전반을 살필 수 있다”며 “19세기 본격적인 해안 방어론 등장 직전 강화를 중심으로 한 조선의 군사 수준과 외세에 대한 방어능력을 살펴볼 수 있는 군사사적으로 매우 귀중한 사료”라고 설명했다.

강화군기수목의 다른 면에는 <팔상록>이 쓰여 있다. 이는 최성엽이 우봉 최씨 일가의 극락왕생과 안녕수복을 기원하며 필사한 것으로 종이 질이 좋았던 관문서를 재활용했다.

이는 <팔상록> 권4에 해당하는 언해본으로서 ‘옥야부인견불수훈’ ‘신일독반견불생신’부터 ‘취녀승불위력개용’ ‘취아견불위능득도’까지 10개 항목이 수록돼 있다. 그 뒤에는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이 <팔상록>과 전혀 다른 글씨체로 부기돼 있다. 책 말미에 ‘서울 관동정 5의 73 불교시보사’라고 적혀 있어 후대에 이를 필사해 팔상록 뒷부분에 덧붙인 것으로 보인다.

이종수 HK겸임교수(동국대 불교학술원)는 “외규장각이 있던 강화도의 군기수목을 이면지로 활용해 <팔상록>을 적은 것을 고려하면 <팔상록> 유통과 왕실 및 관인 층에서의 불교신앙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추적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용태 HK전임교수(동국대 불교학술원)는 “다만 책 뒷면을 활용해 <팔상록>이 필사되고 이후 제책됐으므로 강화부 군기 고문서 내용에 일부 누락된 부분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문화재적 가치를 떨어뜨릴 정도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 이종수 동국대 HK겸임교수가 평창 지암정사 소장 '팔상록'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는 앞 '팔상록' 뒤 '강화군기수목'이 수록돼 있다.

김종욱 원장(동국대 불교학술원 불교문화연구원)은 “본 자료의 발굴은 불교기록문화유산의 조사 및 정리 사업이 불교, 유교를 포함한 한국의 역사와 전통문화를 아우르는 다방면의 문헌자료와 고문서를 새로 발굴, 소개할 수 있음을 입증시켜 줬다”며 “향후에도 전국적 규모의 기록문화유산 조사사업을 통해 다양한 분야의 학제적 연구에 이바지하고 한국의 역사전통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환기시킬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지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병인양요는…

1866년(고종 3)에 발발한 병인양요는 조선의 천주교 박해를 빌미로 프랑스함대가 강화도에 침범한 사건이다. 9월 18일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군함 3척은 한강을 거슬러 양화진(楊花津)을 통과하여 서울 지근인 서강(西江)에 이르렀다. 조선의 삼엄한 경비 탓에 프랑스 함대는 물러났지만 10월에 함대 7척과 600명의 해군을 이끌고 다시 나타났다. 10월 14일 프랑스 군대는 강화부(江華府) 갑곶진(甲串津) 인근의 고지를 점거하고 16일 강화성을 공격하여 점령한 후 무기와 식량, 책 등을 약탈하였다. 10월 26일 프랑스군 약 120명이 문수산성을 정찰하려다 조선군에게 27명이 사상되는 등 인명손실을 입자 민가와 군영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포격을 가했다. 11월 7일 프랑스 해병 160명은 정족산성을 공격하다가 양헌수가 이끈 500명의 사수들에 의해 사망 6, 부상 30여 명의 손실을 입고 갑곶으로 패주하였다. 11월 11일 프랑스군은 강화성에서 퇴각하면서, 관아에 불을 지르고 약탈한 은금괴(당시 돈으로 3만8000달러)와 외규장각 도서 등 왕실 관련 중요 서적을 갖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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