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의 위기와 불교의 대안] 7. 불교의 대안(3)
[불평등의 위기와 불교의 대안] 7. 불교의 대안(3)
  • 이도흠 정의평화불교연대 공동대표
  • 승인 2021.09.27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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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처공동체

“신자유주의 해체 대안은 지역 불교공동체에서 화쟁의 사회경제학 완성”

한 노동자가 아무리 자성적 사고와 집착을 깼다 하더라도 홀로 전적으로 환멸문의 노동을 하기 어렵다. 이 체제 안에서 모든 것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신자유주의 체제를 해체하고 화쟁의 사회경제학을 구현할 수 있는 근본적인 대안은 99%가 각성을 하고 연대하여 국가와 자본의 연합체를 전복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힘의 역학관계상 쉽지 않다. 지금 권력은 과도하게 비대칭적이다. 모든 무기와 정보와 자본은 국가와 자본의 연합체에 집중되어 있다.

현재 상황에서 가능한 대안은 국가 단위의 전복을 모색하되, 지역 단위의 불교 공동체를 만들어 이곳에서 화쟁의 사회경제학을 실천하고 완성하는 것이며, 지역 곳곳에 이를 만들어 신자유주의 체제를 안으로부터 내파하는 것이다. 이런 불교공동체를 가능하게 하는 논리의 싹을 화쟁에서 찾아보자. 연기적 존재로서 깨달음을 한 차원 더 높게 승화한 것이 원효의 진속불이(眞俗不二)론이다.

“평등한 상(相)이 또한 공(空)하다”란 곧 진제(眞諦)를 융합하여 속제(俗諦)로 삼은 “공공(空空)”의 의미이니, 순금을 녹여 장엄구를 만드는 것과 같다. …… “차별상(差別相) 또한 공(空)하다”라 한 것은 이 속제를 다시 융합하여 진제로 삼은 것이니, 이것은 장엄구를 녹여 다시 순금으로 환원시키는 것과 같다. …… 또 처음의 문(門)에서 “속제를 버려서 나타낸 진제”와 제2의 공(空) 가운데 ‘속제를 융합하여 나타낸 진제’인 이 2문의 진제는 오직 하나요 둘이 아니며, 진제의 오직 한 가지로 원성실성(圓成實性)이다. 그러므로 버리고 융합하여 나타낸 진제는 오직 하나이다.

금덩이를 녹여 금반지로 만들고 금반지를 녹이면 다시 금덩이로 돌아간다. 금반지에도 이미 금의 본성이 담겨 있다. 진제와 속제, 부처와 중생도 마찬가지다. 중생의 마음은 본래 하늘처럼 청정하고 도리에 더러움이 없기에 중생은 경계를 지어 세계를 바라보지 않는다. 다만 본래 청정한 하늘에 티끌이 끼어 더러운 것처럼 무명에 휩싸여 경계를 지어 세계를 바라보니, 이 경계는 허망한 것이다. 이 모두 마음의 변화로 인하여 생긴 것이니 만일 마음에 허망함이 없으면 곧 다른 경계가 없어지고 중생 또한 본래의 청정함으로 돌아간다. 유리창만 닦으면 하늘이 다시 청정함을 드러내듯, 무명만 없애면 본래 청정한 중생 속의 불성이 스스로 드러나 중생이 바로 부처가 된다. 그러니, 깨달음의 눈으로 보면[圓成實性], 부처와 중생, 깨달은 자와 깨닫지 못한 자가 둘이 아니요 하나요, 중생이 곧 부처다.

그리하여 저 아름다운 연꽃이 높은 언덕에 피지 않는 것과 같이 내가 부처가 되었어도 열반의 성에 머무르지 않으며,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는 것과 같이 세간의 중생을 구제한 뒤에 열반을 얻는다. 깨달음이란 어떤 계기를 통하여 세계를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인식하여 온갖 경험과 기억과 의식을 찰나적으로 재배열하는 것이자 ‘참나[眞我’]를 찾아 존재를 거듭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깨달음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가 나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지혜이고, 그를 위하여 그리로 가 그들과 함께 하며 그들의 고통을 없애 주는 것이 바로 자비행이다. 타자를 구원하거나 계몽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 속에 숨어있는 불성을 드러내며, 이 순간 나 또한 부처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기에, 진정한 깨달음은 내가 그리로 가 그를 완성시키고 그를 통해 다시 나를 완성하는 행위다. 원효는 열반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부주열반(不住涅槃)을 추구하였고, 이를 몸소 실천하고자 누더기 옷을 입고 박을 두드리며 중생 속으로 내려갔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선언』에서 적극적 자유는 사회적 개인들의 자기발전이므로 각 개인이 타자를 더 많이 향상시켜 줄수록 그들 각자의 발전의 여지는 더욱 커진다며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가 들어선다.”라고 선언한다. 마르크스가 볼 때 개인은 사회관계 속에 있는 개인(individuals in social relation)이다. 개인이 자신과 타자와 관계를 인식하고 진정한 자기를 실현하고자 할 때 주체가 된다. 주체는 모든 구속으로부터 자유라는 소극적 자유(from freedom) 뿐만 아니라 자기 앞의 장애와 소외를 극복하고 진정한 자기를 실현하면서 적극적 자유(to freedom)를 쟁취한다. 더 나아가 주체는 타자와 자신이 사회관계 속에서 밀접하게 관련이 있음을 깨닫고 타자의 자유를 더 확대하려는 대자적 자유(for freedom)를 구현한다.

“마르크스의 이상 사회는 타자의 자유를
확대하기 위해 서로 노력하는 사회”

마르크스가 추구한 이상 사회는 개인이 사회 관계성과 주체성을 함께 인식하고서 정의, 곧 타자의 자유를 확대하기 위하여 서로 노력하는 사회이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나 아닌 다른 이를 좀 더 행복하고 자유롭게 하려고 서로 갖은 실천을 다하는 사회를 꿈꾸었다. 가진 자, 못 가진 자 없이 모두가 모여 함께 할 일을 정하고 일하는 자들이 땅과 공장을 공유한다. 이곳에서 노동은 더 이상 소외된 노동이 아니다. 가치를 생산하고 자기 앞의 장애와 소외를 극복하여 자신의 본성을 구현하고 진정한 자기를 실현하는 방편이자, 세계를 자신의 목적대로 변형하는 실천이다. 더 나아가 나의 노동을 통하여 타인을 자유롭게 하는 이타적(利他的)인 동시에 대자적(對自的)이고 적극적인 자유를 실현하는 수단이다. “각자의 능력을 따름에서 각자의 필요에 따름으로”라는 그가 제시한 원칙에 나타난 대로 사람들은 우열이 아니라 차이에 따라 존재의의를 가지며 능력이 아니라 필요한 만큼 생산하고 분배한다. 타인을 자유롭게 하여 나는 더 자유롭게 되고 자유로워진 나로 인하여 타인은 더욱 자유롭게 된다. 이 순간 자유는 나 아닌 타자를 더욱 자유롭게 하는 실천으로서 정의와 부합한다. 정의 또한 자유를 전적으로 발전시키는 조건이 된다. 자신의 자유로서 진정한 자기실현을 달성한 개인은 상호관계성으로서 정의가 실현되고 적극적인 자유를 구현하는 조건에 각 개인이 평등한 권리를 갖는 것이 인정되는 공동체를 요청한다.

이제 근본적으로 자본주의나 국가 외부가 아니라 그 안에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를 모두 극복할 수 있는 진지이자 그를 대체할 체제인 대안의 코뮨을 만들어야 한다. 공포에 맞서고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으려면,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제국이 동일성의 패러다임에서 타자를 상정하고 그를 배제하고 폭력을 가한 것을 지양하려면, 대중은 눈부처-주체로 거듭나야 한다.

“눈부처=타자 속에서 불성(佛性)을 발견하여 그를 부처로
만들고 이 과정을 통하여 자신도 부처가 되려는 자”

눈부처-주체는 원효의 화쟁 이론, 특히 변동어이(辨同於異)론에 바탕을 한 것이다. 눈부처-주체는 타자와 무한한 연관 속에서 차이와 가유(假有)로서 주체를 형성하는 자다. 그는 주체로서 모든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소극적 자유를 추구함은 물론, 부조리한 세계에 저항하여 이를 자신의 목적에 맞게 개조하는 행위를 통해 자기를 실현하는 적극적 자유 또한 구현한다. 하지만, 눈부처-주체는 이에 머물지 않고 동일성의 사유를 뛰어넘어 내 안의 타자, 타자 안의 내 모습을 동시에 보는 자이면서 타자 속에서 불성(佛性)을 발견하여 그를 부처로 만들고 이 과정을 통하여 자신도 부처가 되려는 자다. 타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이기적 욕망을 자발적으로 절제하고,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하며 타자를 더 자유롭고 행복하게 하는 실천을 하면서 진정한 자기를 완성한다. 자기 소외와 노동의 소외를 극복하고 자기의 혁명과 사회 혁명을 종합한다. 이 순간에 느끼는 희열이 바로 대자적 자유이자 아우름의 ‘신명’이다.

“눈부처 공동체는 공동 생산하고 분배
모든 생산수단·도구는 공동 소유”

하지만, 현실은 대중들이 눈부처-주체로 거듭나지 못한 채 욕망의 노예와 지배층에 휘둘리는 어리석은 우중으로 머문다는 점이다. 모두가 눈부처-주체가 된다 하더라도 부단한 자기해체와 이를 제도화하는 시스템이 없다면 언제든 눈부처-주체성을 상실할 수 있다. 때문에 사회 자체를 새로운 체제로 변혁해야 한다. 절충적인 제3의 길을 넘어선 대안은 화쟁의 패러다임 속에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여전제(閭田制), 렉토르스키의 뻬레스트로이카를 결합한 눈부처공동체다.

눈부처공동체는 구성원 각자가 눈부처주체로서 실존하고 실천한다. 눈부처 공동체는 공동으로 생산하고 분배한다. 모든 생산수단과 도구는 공동의 소유다. 이 공동체 생산의 60%는 필요에 따른 공동생산과 공동분배를 한다. 나머지 20%는 재투자를 하며, 10%는 개인의 능력별로 인센티브를 주어 개인의 창의력을 발현할 동기를 부여하며, 10%는 장애인, 이주노동자 등 더 가난한 자에게 베풀어 대자적 자유를 구체화한다.

능력이 아니라 필요에 따른 노동, 장애를 극복하는 자기실현으로서 노동, 철저히 자연과 공존하는 생태 노동을 한다. 그것이 불가능한 도시의 공동체는 유기농 농사를 짓는 농촌공동체와 연합관계를 형성한다. 단기적으로는 친환경 무상급식을 로컬푸드와 연결시키고 민중을 자각시키고 조직하여 신자유주의를 내파하는 진지로 만들고, 장기적으로는 자본주의 체제 곳곳에 코뮌을 만들어 이를 대체하는 사회구성체로 구성한다.

몬드라곤처럼 노동이 자본을 통제하며, 노사관계는 진속불이의 관계가 되도록 한다. 경영자와 노동자는 하나가 아닌 동시에 둘도 아니다. 노동자들이 총회에서 자신들 가운데 이사를 선출하고 이들이 노동자들과 유기적으로 소통하고 협력하는 가운데 일정 기간 동안 경영과 중요한 결정을 한다. 일정 기간이 지나가면 노동자로 돌아간다. 이사들이 전문 경영자를 외부에서 초빙할 수도 있는데, 경영진은 총회 및 이사들의 통제를 받는다.

구성원간 노동의 목적과 방법에서부터 분할 비율에 이르기까지 전체 과정을 모든 구성원이 동등한 권력을 갖고 참여하는 거버넌스(governance) 시스템으로 운영한다. 모든 사람의 가치와 권력은 사회적 지위, 젠더, 나이, 재력에 관계 없이 1 대 1로 동등하다. 중요한 안건은 모든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총회에서 결정하며, 모든 구성원이 1인 1표의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 가족 단위의 사생활은 보장하고 간섭도 하지 않되, 이를 벗어난 공동체의 정책과 실현, 규약의 제정과 집행, 재정의 운영 등의 문제는 모든 이들이 동등한 권력을 갖고 참여하여 회의를 통해 민주적으로 결정한다.

시장과 자본제의 외부에서 물화를 극복할 수 있는 방편으로 따로 마을 화폐를 만들어 사용한다. 단 마을 화폐는 7일마다 10%의 가치가 감소되고 7주 후에는 0원의 가치를 갖게 하여, 가치척도, 유통수단, 축적수단, 지불수단, 세계화폐 등 화폐의 다섯 가지 기능 가운데 가치척도와 유통의 기능만을 수행한다. 외적으로는 불일불이(不一不二)의 패러다임을 따라 공동체와 다른 집단을 네트워킹하고, 내적으로는 진속불이(眞俗不二)의 원리에 따라 구성원간 상호주체성과 상보성을 높이는 것이다.

학교는 따로 대안의 학교를 만들며, 지성, 야성, 감성, 연대를 함양하는 교육에 초점을 맞추되, 가르치는 것은 최소화한다. 우열이 아니라 차이에 의해, 각자가 동등한 능력과 재능의 소유자란 관점에서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학습한다. 책 읽고, 사색하고, 타인의 슬픔에 공감하고 서로 토론하고 함께 공동의 과제를 수행하고 아름다운 것을 가슴에 담고 의롭지 못한 것에 저항하고 연대하는 감성을 기른다. 우리 전통의 놀이와 예술 가운데 공동체적이고 생태적이고 민중적인 것을 부활하여 활성화하며 다른 나라의 문화 예술도 똑같이 존중하여 수용한다. 어려운 상황에 놓인 약자와 함께 하게 하면서 자연스럽게 공감의 연대와 정의로운 실천을 몸에 스미게 한다. 필요에 따른 노동을 최소화하고 많은 시간을 함께 어울려 노는 데 할애한다.

“눈부처공동체 구성원은 욕망의 자발적 절제
소욕지족 삶으로 전환하며, 수행 청규도”

구성원은 욕망의 자발적 절제를 통한 소욕지족(少欲知足)의 삶으로 전환하며, 이를 수행하기 위한 청규를 둔다. 이렇게 운영하되, 확고하게 정의관을 확립하고 깨달음에 이른 자라도 언제든 탐진치에 물들고, 이기심과 욕망에 기울어질 수 있기에 깨달음이 곧 집착이라는 명제 아래 매일 일정한 시간에 수행하고 참회한다.

여기서 자연환경과 공존하는 도농(都農)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 대안인데, 이것 또한 일정한 이윤을 내야 한다. 자비행을 실천하면서도 이윤을 확보하는 대안은 코피티선(co-opetition)의 원리를 경영에 응용하는 것이다. 원효는 일심(一心)과 이문(二門), 진여문과 생멸문의 화쟁을 모색한다.

진제와 속제는 둘이 아닌 동시에 하나를 지키지 않는다. 둘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곧 일심이요, 하나를 지키는 것도 아니기에 체를 들어 둘로 삼는 것이니 이것을 일러 一心二門이라 한다. 이상이 그 대의이다.

깨닫지 못한 자는 세계를 둘로 나누어 인식한다. 그러나 세계는 하나다.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하나지만, 중생들의 일상에서 보면 이데아와 그림자, 주와 객 식으로 모든 것이 둘로 나누어져 있으니 하나에 머무르면 일상의 삶을 영위할 수 없다. 그러니 하나를 고집하지도 않는다.

“협력(cooperation)이 일심이고 진여문이며,
경쟁(competition)이 이문이고 생멸문”

분별심을 떠나 깨달으면 부처가 된다. 일상에서 깨달음의 세계, 더러운 세계에서 청정한 세계, 허위에서 참을 지향하고자 하면 진여 실제는 하나이다. 하지만, 깨달음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중생을 구제하고자 중생을 향하여 나아가 중생과 더불어 실천하고 생각하며 그들을 깨우치고자 하면 세계를 둘로 말해야 소통이 가능하다. 그러니, 진여실제가 하나이지만 둘로 가르는 것은 용(用)이요, 둘이 허상임을 깨닫고 하나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은 체(體)이다. 이처럼 원효는 일심이문의 회통을 통하여 부처와 중생,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을 아우르려 한다.

여기서 협력(cooperation)이 일심이고 진여문이며, 경쟁(competition)이 이문이고 생멸문이다. 코피티선 이론은 게임이론을 이용하여 경쟁이 현실인 비즈니스에서 협력을 하여 서로 상생할 수 있는 경영의 길을 모색한다. 엡슨과 HP사를 예로 들며 경영이 연기적 관계임을 간파한 점, 당위적, 도덕적으로 선의의 경영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의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현실에서 서로 상생할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한다는 점, 풍부한 사례를 통하여 상생 경영의 성공담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예를 들어, 밀워키에 본사를 둔, 크레인을 이용하여 원목 운반작업을 하는 하니슈페거 인더스트리(Harnischfeger Industries)사는 1970년대 중반부터 대형 지게차 대신 하역 크레인을 사용하여 이론상으로 크레인 한 대에 500만 달러를 벌 수 있었다. 문제는 경쟁사였다. 1987년에 소규모 크레인 제조사인 크랑코(Kranco)사가 시장에 진출하면서 경쟁이 시작하였다. 여기서 하니슈페거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가격경쟁을 하는 것이다. 크랑코는 부채를 매입한 회사로 자금이 부족하였기에 이 방법을 쓰면 하니스페거사가 절대 유리한 시점에서 크랑코사를 몰락시킬 수 있었다. 또 하나는 구매자를 늘려 서로가 상생하는 길이다. 하니슈페거가 원목장 회사에 새로운 기술의 이점을 보여주면 시장을 크게 확대할 수 있었다. 크랑코사의 크레인 제작 능력에는 한계가 있었기에 새로운 고객의 대부분은 하니슈페거사의 차지였을 것이다. 하니슈페거사는 가격경쟁을 선택하였다. 크랑코사는 예상대로 파산을 선언하였으나 핀란드 굴지의 토목기술회사인 콘(Kone)이 크랑코사를 매입하였다. 이 바람에 하니슈페거사는 가격인하로 인한 손해만 본 채 더욱 강력한 경쟁자를 만났다. 하니슈페거사가 새로운 기술을 이용하여 고객을 늘리는 방법이 바로 코피티선적 경영이다. 닌텐도와 TWA사는 코피티선의 경영을 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처럼 참가자, 경쟁자, 보완자, 부가가치, 규칙, 전술 등이 서로 연기적으로 영향을 끼침을 고려하여 코피티선의 경영을 하면 상생을 하면서도 이윤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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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흠 교수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 - 화쟁사상을 통한 형식주의와 마르크시즘의 종합>, 인류의 위기에 대한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 <신라인의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읽는다> 등을 썼고, 틱낫한의 <엄마>를 번역했다.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상임의장, 계간 <불교평론> 편집위원장, 계간 <문학과 경계> 주간, 한양대 한국학연구소 소장, 정의평화불교연대 상임대표를 역임했다. 한국기호학회 회장과 한국언어문화학회 회장을 지냈고, 한국시가학회 회장을 재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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