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에 올라
인왕산에 올라
  • 현각 스님
  • 승인 2014.10.30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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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현각 스님의 <클릭! 마음의 두드림>- 70.

지척에 두고도 덥다고 오르지 않고 춥다고 오르기를 꺼리던 산이다. 이렇게 좋은 날에는 핑계거리가 없다. 저 고운 비단옷을 보고도 오르지 않는다면 감정이 퍽 메마른 것이다. 얼마 만에 오른 산인가. 인왕산에 미안한 마음이 깊은 이랑을 만든다.

로프를 잡고 암벽을 오르면 숨을 고를 평지가 나온다. 다음 오를 곳이 가파르니 간단한 몸 풀기를 한다. 또 오른다. 조붓한 길옆에 구절초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 구절초는 이른 봄부터 싹을 틔운 후 가을에야 꽃을 피운다. 그 방향이야 느껴 본 사람만이 아는 천향이 아닐까 생각한다. 금년 가을에는 그 천향을 누리는 호사를 놓치고 말았다. 늦장을 부려서이다. 산에 오르는 게으름이 만개를 볼 시기를 잃고 만 것이다. 꽃은 한살이의 갈무리를 하였다.

꽃이 얼마나 기다리고 있다가 지고 말았을까 생각하니 아쉬움보다 송구스럽기까지 하다. 누군가는 별난 걱정도 하고 있다고 탓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서로가 상상함이 다른 것이 문학의 세계이고 사유의 세계이니 어떤들 어떻겠는가. 누군가가 보고, 느끼고, 지켜 주었을 구절초는 행복이 넘치는 가을을 보냈을 수도 있었겠지. 그랬다면 나의 생각은 한낱 기우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산행 길에는 소나무가, 계곡에는 산벗나무가 가을 흥취를 돋우고 있다. 마치 페르샤 여인의 손길을 옮겨 놓은 듯하다. 그 여인의 손길이 미친다 해도 저리 고운 빛의 카펫을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두목(803~853)은 <산행>이란 시를 썼다. ‘수레를 멈추고 만추의 단풍을 구경하노라니, 서리 맞은 단풍잎이 2월의 꽃보다 붉구나(停車坐愛楓林晩 霜葉紅於二月花)’라고 읊었다. 독자 가운데 2월에 웬 꽃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는 일이다. 부연하자면 중국 강남의 2월은 봄이기 때문이다.

산에 오르면 평지길이 나온다. 우선 일쭉거리기가 쉽다. 걷기가 편해 몇 차례 왕복하다 보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채 느끼지 못했던 것들도 느낄 수 있게 된다. 한가롭다는 것은 삶의 굴곡이 적다는 것이 아닌가 한다. 시절에 맞추어 익은 도토리가 가랑잎에 자리 잡았다. 마치 입정(入定)에 든 모습이다. 땅에 보이는 도토리는 종족번식의 본능을 드러내고 있는 듯도 하다.

일상의 반복에 걱정스러움이 없는 생명체가 어디 있으랴 마는 결실을 맺은 알알은 모든 시름을 떨친 성자의 모습이다. 이겨서 기쁘고 졌다고 애통해하는 모습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다. 저런 초탈한 면면은 보는 이의 가슴에 잔잔한 감동을 준다.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산초는 풍뎅이의 점박이 마냥 도드라져 보인다. 개중에 알갱이를 떨군 껍질은 심한 열병을 앓다 터진 부스럼 같아 보기가 괴상스럽다.

마침내 목적지에 당도했다. 확 트인 시야가 가쁜 숨까지 평정을 찾게 한다. 힘써 오르거든 반드시 내려서야 하는 것이 산길이다. 산천이 좋다고 내려서지 않는 산길은 사는 길이 아니다. 이승과 저승을 갈라놓을 때나 허락되는 일이다. 산길에서 배우는 것은 오르막도 있고 내리막이 있으며 돌부리에 걸리고 허방을 딛기도 한다. 삶의 여정과 너무 흡사하다. 희노애락에 장단을 맞추어 살고 있는 인간의 삶은 푸석하기도 하다. ‘돌부리를 차면 발부리만 아프다’는 옛말이 있듯이 공연한 일에 흥분하여 제 몸만 상하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좋아하고 미워하며 반목과 대립으로 살기에는 너무 짧은 삶이다. 각자의 살림 챙기기에도 턱없이 모자라는 시간이다.

김부식은 당대의 대방가(大方家)인 정지상을 시기하였다. 그 이유는 단순하였다. 상대가 자기보다 글을 잘 한다는 이유에서이다. 마침내 묘안을 찾던 중 그가 묘청의 난에 가담하였다 하여 역모로 죽일 구실을 찾아냈다. 김부식은 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후세 사람들이 어떻게 평할까 항상 마음에 짐으로 남았다. 번민으로 나날을 보냈다. 어느 날 개성에 있는 감로사를 찾아 자신의 심경을 진솔하게 토로하였다.

속객부도처 등임의사청(俗客不到處 登臨意思淸)
산형추갱호 강색야유명(山形秋更好 江色夜猶明)
백조고비진 고범독거경(白鳥高飛尽 孤帆獨去輕)
자참와각상 반세멱공명(自慙蝸角上 半世覓功名)

속세의 사람들이 당도하지 않은 곳에 오르니 내 생각이 맑구나
산의 형색은 가을이니 더욱 좋고 강색은 밤이 되니 오히려 밝다
새들은 하늘 높이 날아갔고 외로운 돛단배는 홀로 가벼이 가네
달팽이 뿔 같이 좁은 세상에 반평생 동안 공명만 쫓았으니 부끄럽구나

좁은 세상에 이름 한번 날려 보겠다고 아등바등했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다고 술회하고 있는 김부식.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편 가르기를 잘 하는 현대인의 심성을 들여다본다. 능력과는 무관하게 내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상대를 백안시 한다. 그러나 반지름의 길이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내 사람의 범주가 확연히 달라진다. 그 측량은 전적으로 본인의 몫으로 남는다. 선택은 항상 자신의 문제다.

개밋둑이 눈에 들어온다. 개미는 오직 입과 발만 가지고 집을 짓기 위하여 흙을 파내어 저렇게 흙가루가 쌓였구나. 성스럽다는 말이 인간세상에서만 통용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미물의 세계에도 그들의 숭고함이 있고 성스러운 행위가 엄존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스승은 냇가에서 흐르는 물을 보고 ‘가는 것이 이와 같다(逝者如斯)’고 하였다. 그는 교육에 힘썼기 때문에 중단 없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강조한 말이다. 또한 만물의 무상함을 탄식한 말이기도 하다.

괴괴한 골짜기에 홍엽이 하늘거리며 대지의 길손이 된다. 석양의 햇살은 더욱 찬란하다. 아무런 미련 없이 지고 있는 홍엽. 그저 무상의 섭리를 거역할 기미는 없어 보인다. 아름다운 율동만이 있을 뿐이다.

   

속리산 법주사로 출가 수행정진했고, 동국대학교 석ㆍ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동국대학교 선학과 교수, 미국 하버드대 세계종교연구센터 초청교수, 동국대 불교대학장, 정각원장, 한국선학회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동국대 불교학술원장 겸 동국역경원장으로 불교학계 발전과 후학 양성에 매진하고 있다.

저서로는 『선학의 이해』, 『선어록 산책』, 『선문선답』, 『선문보장록』, 『선 사상론』, 『선 수행론』, 『한국선론』, 『벽암록의 세계』, 『한국을 빛 낸 선사들』, 『선심으로 보는 세상』 연보로 구성된 『최현각 선학전집』(전11권), 『내 사유의 속살들』, 『현각스님의 마음 두드림』등이 있고, 그 외 다수의 논문과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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