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주객반
주주객반
  • 현각 스님
  • 승인 2015.03.04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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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현각 스님의 <클릭! 마음의 두드림>- 88.

글을 익힐 때 일이니 퍽 오래된 일이다. 책상 앞에는 장문의 글이 붙어 있었다. 글의 내용은 주자십회훈(朱子十悔訓)이었다. 주희 선생은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면서 저지르기 쉬운 후회 가운데 중요한 열 가지를 제시한 것이다.

흰 바탕의 붓글씨는 마분지처럼 종이가 누렇게 탈색되었다. 이따금 먹이를 찾아 나선 파리인지, 휴식을 취하고자 하는 파리인지 분간하기는 어려우나 그가 내려앉는 날이면 사달이 난다. 글씨와 종이를 분간할 줄 모르는 파리는 아무데나 실례를 하고 만다. 큰 글씨라 망정이지 작은 글씨 같은 경우는 글씨가 달라지고 만다. 청결하게 보존하고 싶어 수건에 물을 적셔 조심스레 지우다 보면 종이까지 벗겨져 나가게 된다. 그래도 본문의 내용은 훼손되지 않아 다행이다.

가르침 가운데 첫째가 “부모님에게 효도하지 않으면 돌아가신 후에 뉘우친다는 불효부모사후회(不孝父母死後悔)”이다. 한국전쟁이란 전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일찍이 아버지를 잃은 나의 입장에서 보면 십회훈 제1관문에서 걸리고 만다. 이런 경우 효도라는 말도 사치스러운 말잔치가 된다.

열 번째가 손님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으면 떠난 뒤에 뉘우친다는 불접빈객거후회(不接賓客去後悔)라 이르고 있다. 손님은 아는 손도 있지만 낯선 손님을 맞을 때도 있다. 친소를 떠나 손님을 대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선 대화의 내용부터 달라지기 때문이다. 아는 사이라면 대화의 탐색전은 사족이 되어버린다. 오직 본론부터 말을 터 가는데 무리가 없다. 그러나 낯선 손님과의 만남은 무슨 의도로 찾아왔는지 궁금증이 발동하기 마련이다. 손님을 맞이하는 마음가짐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누구나 떨쳐내기 쉽지 않은 선입견이 우선 한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주인의 입장에서 주안상이라도 준비할 만한 손님이 오면 제일 편안한 손님맞이가 될 성싶다. 일정 부분의 허물도 눈감을 만한 사이가 되기 때문이다. 허심탄회하게 일배일배부일배(一杯一杯復一杯) 하다보면 세상의 온갖 시름도 잊을 수 있어 좋다.

주인은 손에게 술을 권하고 손은 주인에게 밥을 권하며 다정하게 식사를 한다는 주주객반(主酒客飯)이란 말이 있다. 주인이 먼저 술맛을 본다는 것이 주법의 강령인지 여부는 아는 바 없다. 그러나 술을 마실 때 어떤 술잔을 쓰는지 궁금증이 발동한다. 술잔을 뜻하는 말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작(杓), 배(杯), 근(巹), 치(巵), 백(白), 함(函), 계영배(戒盈杯)가 있다.  작은 술을 푸는 기구이기도 하고, 배는 일반인이 보통 때 마시는 술잔이다. 근은 합환주(合歡酒)라고 하여 혼례 시에 신랑, 신부가 쓰는 정갈하고 성스러운 술잔이다. 치는 됫술을 담을 수 있는 큰 술잔이고, 백은 벌주를 내릴 때 쓰는 잔이다. 함 또한 술잔의 일종이다. 계영배는 절주배라고도 한다. 그래서 잔의 7할 이상을 채우면 모두 밑으로 흘러내려 넘침을 경계하는 잔이다. ‘과욕을 부리지 말라’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물이기도 하다.

계영배의 유래는 의기(儀器)에서 연유한다. 제나라 환공이 늘 곁에 두고 보면서 스스로의 과욕을 경계하기 위해 사용했던 것이다. ≪순자≫의 <유좌편(宥坐篇)>에서 볼 수 있는 이 그릇을 유좌지기(宥坐之器)라고 부른다. 항상 곁에 두고 보는 그릇이라는 뜻으로, 마음을 가지런히 하기 위한 스스로의 기준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 거상인 임상옥(林尙沃)은 스승에게서 찻잔을 받았는데 이 또한 계영배라고 한다. 그는 후일 곽산(郭山) 군수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으며 빈민 구제에 앞장섰고 시와 술로 여생을 보냈다. 남한에는 최부자가 있고 북한에는 임부자라 하여 부자의 표상으로 회자되는 사람이 곧 임상옥을 지칭하는 말이다.

항상 자신의 곁에 두고 볼 수 있는 그릇, 유좌지기가 있어 흐트러진 마음을 가지런히 하기 위한 그릇을 챙겨 봐야 할 일이다. 대의명분이라는 미명하에 당치도 않은 행동을 하고 있지나 않는지 주변을 살펴보아야 할 일이다. 그러한 그릇이 없다면 경전의 가르침이 있다. 경 어느 쪽을 펴 봐도 세존은 다정한 어조로 중생에게 경계하는 가르침을 주고 있는 듯하다. 경전 볼 때 마음과 덮어 놓았을 때 행동이 달라진다면 표리가 있는 짓이고 마음에 진한 속앓이가 남을 뿐이다.

우리는 예외 없이 마지막 여행길에 올라야 한다. 마지막 길에 필요한 것이 물질이 아니다. 그렇다고 명예도 아니다. 무게마저도 측량하기 어려운 양심의 소리가 동반할 때 편안해질 수 있다. 마지막 여정에서 억지는 절대 통하지 않는다.

조선 중기의 남사고(南師古, 1509~1571)는 천문ㆍ지리에 해박한 명 지관이었다. 그의 명성을 익히 들었던 임금이 남사고를 불러들였다. “이 나라의 흥망성쇄가 어찌 되겠는가”라고 물으니 남사고는 태연히 “주주객반이어늘, 주주객반이어늘”이라고 반복하였다. 임금의 질문을 빗겨가는 엉뚱한 말만 하자 재차 물었다. 역시 “아, 주주객반이어늘” 말만 되풀이 하였다. 이 무미건조한 말에 화가 치밀어 답답한 나머지 투옥시키고 말았다.

세월은 흘러 영의정 김중기(金重器)는 야심을 품고 임금을 죽일 계획을 세웠다. 자신의 생일잔치에 초대하여 독살하려는 것이었다. 독약을 탄 술 단지를 내놓고 술을 따르는데 남사고의 말이 문득 생각났다. 임금이 “주주객반이어늘” 하자 김중기는 독약을 탄 술을 자신이 마실 수밖에 없었다. 임금은 “내가 이렇게 훌륭한 혜안을 가진 남사고를 옥사시켰구나”라면서 뒤늦게 후회하였다.

사람이 사람을 알아본다는 것 같이 어려운 일이 없는 듯하다.  고금을 통털어 보아도 지도자는 꼭 옳은 사람을 잃고 나서 후회한다. 옆에 있는 사람만이 충신인 듯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곁에 있기로 하면 그림자를 능가할 만한 것이 없다. 그림자에게 무슨 역할이란 없다. 그저 허상일 뿐이다. 허상의 존재가치는 미미하다. 허상은 신기루일 뿐이니까.

   
속리산 법주사로 출가 수행정진했고, 동국대학교 석ㆍ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동국대학교 선학과 교수, 미국 하버드대 세계종교연구센터 초청교수, 동국대 불교대학장, 정각원장, 한국선학회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동국대 불교학술원장 겸 동국역경원장으로 불교학계 발전과 후학 양성에 매진하고 있다.

저서로는 『선학의 이해』, 『선어록 산책』, 『선문선답』, 『선문보장록』, 『선 사상론』, 『선 수행론』, 『한국선론』, 『벽암록의 세계』, 『한국을 빛 낸 선사들』, 『선심으로 보는 세상』 연보로 구성된 『최현각 선학전집』(전11권), 『내 사유의 속살들』, 『현각스님의 마음 두드림』등이 있고, 그 외 다수의 논문과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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