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선지식] 비승비속의 활불 만해
[한국의 선지식] 비승비속의 활불 만해
  • 이기창
  • 승인 2006.07.25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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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반진수(滿盤珍羞)를 잡수신 뒤에 비지찌개를 드시는 격으로 내 말을 들어주십시오. 아까 동대문 밖 과수원을 보니 가지를 모두 잘라 놓았는데 아무리 무정물(無情物)이라도 대단히 보기 싫었고 그 무엇이 그리웠습니다.” 청중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심전심이었다. 만해는 자유를 빼앗긴 민족의 처지를 과일나무의 가지치기에 비유한 것이었다. 감시를 위해 임석한 일본형사는 영문을 몰라 한 청중에게 물었다.

“낸들 알겠어요. 남들이 박수를 하니 따라 쳤을 뿐이지요.” 시치미를 뗀 대답이었다. 1922년 옥살이에서 풀려난 만해는 종로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 연단에 자주섰다. 그리고 대중강연을 구국혼 고취의 기회로 활용했다. 이 강연도 마찬가지 자리였다.

“진정한 자유는 누구에게서 받는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 주는 것도 아닙니다. 서양의 모든 철학과 종교는 ‘신이여, 자유를 주소서” 하고 자유를 애걸합니다. 그러나 자유를 가진 신은 존재하지도 않고 또 존재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람이 부자유스러울 때 신도 부자유스럽고 신이 부자유스러울 때 사람도 부자유스럽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자유를 지켜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이여 자유를 받아라’ 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만해의 사상을 함축한 강연이었다. 불교적 자유는 절대성을 생명으로 한다. 해탈의 걸림없는 자유다. 서구의 상대적 자유개념과는 차원이 다르다. 만해의 자유사상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에 근원을 두고 있다. 불교가 마음의 종교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독립운동가, 불교개혁가, 근대시성의 삼위일체- 만해용운(萬海龍雲ㆍ1879~1944)의 삶을 흔히 이렇게 특징 짓는다. 만해에 대한 절집의 평가는 긍ㆍ부정이 교차한다. 특히 정통한국불교의 장자교단 조계종의 시선은 그리 따뜻하지가 않다. 심지어 “만해 자신이 유마경의 대승적 무애를 내세워 자기에 알맞은 불교와 수행의식을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원인은 다른 데 있지 않다. 만해의 환속과 결혼이다.

“금제(禁制ㆍ결혼금지)를 할 수록 승려의 파계와 범죄는 속출해 도리어 기강이 문란해질 것이 아닌가. 한 나라로서 제대로 행세를 하려면 적어도 인구는 1억쯤 되어야 한다. 우리 인구가 일본보다 적은 것도 수모의 하나다.” 만해는 1910년 백담사에서 집필한 ‘조선불교유신론’을 통해 승려의 결혼을 주장했다. “만해가 미쳤군!” 그를 누구보다 아끼고 이해했던 한영과 용성의 단호한 반응이었다. 그러니 불교계의 비판은 볼 보듯 뻔했다.

사실 승려취처(娶妻)는 불교유신론의 핵심이 아니다. 유신의 지향점은 대중불교였다. 만해의 대중불교는 대승불교의 다른 얼굴이다. 대승불교는 중생을 부처의 세계로 이끌겠다는 발원을 세우고 자비행을 실천할 때 완성된다.

만해는 그 방편으로 교리, 경전, 제도, 재산의 민중화를 주장했다. 만해의 시 ‘나룻배와 행인’은 중생에게 한없는 자비를 베푸는 보살행을 노래한다. 인권환 고려대 교수는 “불교유신론은 급진적이고 과격한 면도 없지 않으나 지금까지도 마땅히 해결돼야 할 과제를 담고 있다”고 평가한다.

1917년은 만해의 삶에서 분수령을 이루는 해이다. 만해는 이해 백담사에서 깨달음을 성취하고 오도송을 짓는다. 이후 만해는 상경, 치열한 삶을 산다.

사나이 이르는 곳 어디나 고향인데(男兒到處是故鄕ㆍ남아도처시고향)
몇 사람이나 오래 나그네로 지냈던가(幾人長在客愁中ㆍ기인장재객수중)
한마디 외쳐서 우주를 갈파하니(一聲喝破三千界ㆍ일성할파삼천계)
눈 속의 복숭아꽃 빨갛게 나부낀다(雪裡桃花偏偏紅ㆍ설리도화편편홍)

넷째 연의 ‘편편홍’은 원래 ‘편편비(飛)’였는데 만해의 도반 만공이 이렇게 수정했다. 우국의 심정이 서린 깨달음의 노래다. 고향과 나그네는 나라 잃은 우리 민족을 상징한다. 눈은 일제의 탄압, 붉은 복숭아꽃은 일편단심의 애국심을 암시한다. 만해의 불교사상, 특히 대승적 사상은 항일운동과 문학세계의 밑바닥에 도도하게 흐른다.

“만해, 이런 개 같은 무리들이 있나.” 상소리라곤 입에 담을 줄 몰랐던 벽초 홍명희가 심우장으로 만해를 찾아와 대뜸 욕을 내뱉었다. 윤치호 최린 이광수 등의 창씨 개명 소식에 분을 참지 못한 것이다.

“벽초가 실언을 한 셈이군.”

“만해, 내가 무슨 실언을 했단 말인가.”

“만일 개 한 마리가 이 자리에 있어 말을 할 줄 알았다면 그냥 있진 않았을 거요. 내가 왜 주인을 모르느냐고, 그러면 어떻게 하겠소.”

개도 제 주인을 안다. 하물며 민족을 외면하고 변절하는 무리야 말로 개만도 못하지 않은가. 암흑의 시대에 만해와 벽초의 기개는 무너질 줄 몰랐다. 만해는 결코 일제와 타협하지 않았던 단재 신채호의 비문을 지었고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다 체포돼 옥사한 일송 김동삼의 장례식을 주선했다. 만해가 만(萬)자를 卍으로도 표기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卍은 엄밀하게 말하면 문자가 아니다. 대승불교의 표식이자 덕의 상징이다.

화엄경에서 卍은 금강계를 장엄하는 마음을 의미한다. 금강은 견고하고 빛나는 부처의 슬기로운 마음이다. 만해의 님은 나라와 민족, 그리고 부처에 다름 아니었다. 당연히 변절과 훼절은 그의 사전에는 없는 단어였다.

만해는 불교와 문학의 일치를 시도한 선사였다. 88편의 주옥 같은 시를 담은 ‘님의 침묵’을 관통하는 수사는 역설의 논리다. 유마경의 논리이기도 하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알 수 없어요’의 첫 구절이다. 수직(垂直)의 파문이란 시어는 비논리의 극치다. 물결의 무늬는 수직이 될 수 없다. 파문은 수직의 대각인 수평의 무늬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더 이상의 적확한 표현은 없다. 이종찬 전 동국대교수는 “잎은 그저 수직으로만 떨어지지 않는다. 좌우로 흔들리며 떨어진다. 오동잎은 나뭇잎중 가장 넓다. 넓은 잎이 좌우로 물결치며 떨어진다. 이 것이 바로 수직의 파문이다.

비논리임이 분명한데 오히려 정확한 논리로 전위됐다”고 설명한다. 만해의 한시에서는 이런 역설의 논리가 드물다. 만해의 시작들은 민족의 영가가 됐다. “만해는 ‘님의 침묵’ 한 권으로 전통을 이어 받은 마지막 시인이자 최초로 민족시인의 영예를 안았다.” 문학평론가 임중빈씨는 이렇게 평가한다.

만해는 1936년 유원숙과 재혼한다. 출가한 뒤 홀로 살아온 만해에게 재혼은 파계의 굴레를 씌운 행위였다. 환속이 또 다른 고통을 잉태한 것이다. 만해는 광복을 한해 앞두고 눈을 감았다. 수덕사의 만공은 “조선에는 사람이 하나 반 있는데 그 한명이 바로 만해야” 라고 그리워했다. 그러면서 반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연보

▲1879.8.29 충남 홍성출생, 속성은 청주 한(韓)씨,법명 용운, 법호 만해
▲1905 설악산 백담사에서 출가, 전 해에 첫 부인 전정숙과의 사이에 아들 보국 태어남
▲1910 승려취처에 대한 건백서 제출. '조선불교유신론' 탈고
▲1914 '불교대전' 발간
▲1918 '유심'지 발행인
▲1919.3.1. 민족대표 33인중 1명으로 3·1운동 이끔, 3년형 선고 받고 투옥, 옥중에서 '조선독립이유서'씀
▲1925 시집 '님의 침묵' 탈고
▲1933 유숙원과 재혼, 이듬해 딸 영숙 태어남.
▲1944.6.29. 심우장에서 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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