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존재의 상호의존적 기호에서 진여를 드러내다
공동존재의 상호의존적 기호에서 진여를 드러내다
  • 서현욱 기자
  • 승인 2018.12.17 10: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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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의 법문] ②이재효/나무·못, 0121-1110=100013
▲ 이재효의 못 0121-1110=106062.

당신은 “못과 나무에서 무엇을 보느냐”
“무엇을 의미하느냐?” 라고 묻지 말라

예술은 어찌 보면 단순하다. 처음 작품을 접했을 때의 느낌, 그 느낌의 좋고 나쁨이 곧 예술성이다. 하지만 쉬운 말을 비틀어서 어렵게 하는 자들이 너무 많다. 그걸로 밥을 먹고 사는 자들도 있는 데 그 또한 밥에 관한 일이라 하는 수 없다. 하지만 연민스럽다.

한 작가의 작품을 읽는 현실의 규정은 주관적 비틀음일지 모른다. 이재효는 자신의 작업에 대한 해설에 ‘침묵’한다.

이재효는 자신의 ‘나무 작업’과 ‘못 작업’을 분석적 언어로 비틀어 해설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는 ‘오해’가 ‘장르’를 낳는 세상에서 자신이 설명을 붙이다보면 “첫 생각과는 다른 작품으로 결과가 규정되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이재효의 작업은 생각의 생각을 거듭해 한순간의 깨침을 형상화하는 것이다.

이재효는 ‘내가 찾은 느낌’을 찾기 위해 경기도 양평의 작업실에서 하루 15시간을 생각하며 지낸다. 그는 자신의 작업과정을 ‘앞생각을 잊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이재효의 ‘생각’은 화두 참구(參究)와 닮았다.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있는 그대로 계속 집중하며 관찰하는 관에서 출발한 생각은 나와 너를 구분하는 이분법적 경계를 버리고 한 발짝씩 본질을 찾는 생각의 길을 좇는다.

▲ 이재효의 나무 0121-1110=106111

무위자연의 심미상태 드러내

“수보리야, 도를 구해 수행하는 자는 청정심(순수한 마음)을 일으키려고 해서는 안 된다. 눈으로 보는 것(色), 귀로 듣는 것(聲), 코로 맡는 것(香), 혀로 맛보는 것(味), 몸으로 느끼는 것(觸),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法), 이들 모두에 집착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이처럼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야한다.” 《금강경》

이재효의 ‘나무’나 ‘못’ 작업은 마음의 순수한 자동현상으로서 입으로 말하든, 붓으로 쓰든, 또는 기타 어떠한 방법에 의해서든 사고의 참된 움직임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 그것은 이성의 어떤 감독도 받지 않고 심미적인, 또 논리적인 일체의 관심을 떠나서 행해지는 사고의 형상화로 보인다. 어떠한 규정이나 규범 등 인공적 개입을 뿌리치고 무위자연의 심미상태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야한다는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의 원리와 다르지 않다.

일상성 추방과 논리의 단절

이재효의 못작업은 그 표현에 있어 일상의 추방, 논리의 단절을 통해 감성·지성·도덕·미로부터, 경쟁·이기주의·절망·비실제적(非實際的)인 것으로부터 탈출해 실제적인 자유의 세계로 돌입하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다. 가치와 도덕에 절어 빠진 합리주의 세계를 털고 생명에의 접근, 자연의 ‘속살’을 드러내며 일상성의 추방과 논리의 단절을 추구하는 초현실적 작업이라 하겠다.

인공의 자연화를 창조

선은 ‘깨달음을 좇는 자의 표현’이며, 초현실주의는 ‘몽롱한 자의 기술’이라고 했지만, ‘깨달음’과 ‘몽롱함’은 둘이 아니며, 표현상의 동일성 또한 우연의 일치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예술 현실에서 선과 초현실주의 예술은 이론적으로는 일치할 수 있지만, 실제 작업에서 예술가는 정신의 물화에서 인공의 자연화를 창조한다.

그는 작가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지금까지의 나의 작업은 못이나 철근 등으로 나무를 결합하여 구나 반구, 원기둥 같은 기하학적인 형태로 나무를 집적하는 작업을 주로 해왔다. 이럴 때마다 나의 고민 중 하나는 못이나 철근 등을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반대로 못만 돋보이게 하고 있다. 무수히 많은 못을 나무에 박아서 휘고, 갈고 한 다음 나무를 태워 못이 돌출 되게 함과 동시에 나무가 가진 나이테나 색상을 까맣게 변화시킨다. 그러면 까만 숯 덩어리 위에 금속성의 반짝이는 못만 두드러져 보인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나는 못으로 나무에 그림을 그린다.”

▲ 이재효의 못 0121-1110=106052.

"나는 못으로 나무에 그림을 그린다"

이재효의 ‘못’ 작업은 소재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냄을 천착한다. 이재효가 추구하는 못의 ‘그대로 드러냄’은 ‘진여의 드러냄’이지만 못 작업 ‘과정의 행위’는 실제적이다. 그의 작업은 일상적인 규정을 거부한다. 못 작업은 가야금을 이루는 나무에서 소리를 찾는 작업과 다르지 않다. 소리는 본래 빈 것이며, 비어야 울리는 것이다. 소리는 나무가 아닌 것이다. 반복적인 ‘못’의 진여(眞如)를 드러냄은 ‘깊이’를 위한 것이지 ‘같음’을 위한 것은 아니다. ‘목표’를 위한 행위가 아닌 오직 ‘과정’ 속에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이다.

소재와 소재를 잇고 결합시키며 자신의 형태와 기능을 감췄던 못을 나무에 박고 다시 나무를 태워 형태와 기능의 본질을 드러내고, 갈아 못의 반짝임을 드러낸다.

물성 숨기고 개별적 존재로 아름다움 드러내

이재효는 못에서 생명의 일상성을 본다. 하나의 녹슨 못은 별 쓸모가 없어 보이지만, 다량의 비슷한 못이 모이면 전체를 이루며 형태는 감춘 채 그 기능을 극대화한다. 하루하루 어렵게 살아가지만 그 사람들이 있어 세상은 아름다워진다. 이재효는 스스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힘이 없다”고 외친다. 하지만 그는 보이는 개별적 존재를 모아 아름다움을 드러내 세상이 아름다워지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녹슬고 휘어진 못 하나라도 가까이 들여다보면 아름답다고 말한다.

이 같은 경계는 〈법성게〉의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의 시각화라 할 만하다. 즉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多)가 곧 하나이다. 한 법이기 때문에 일체가 있고 하나의 법이 모든 법이다. 하나 가운데 모든 것(일체)이 있고 모든 법 가운데 하나의 법이 있는 것이라는 뜻을 형상화했다고도 볼 수 있다. 더욱이 하찮은 못 한 개라도 그 못의 아름다움은 전체의 아름다움의 근원이기에 〈법성게〉의 ‘법성원융무이상 제법부동본래적 무명무상절일체 증지소지비여경(法性圓融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 無名無相絶一切 證智所知非餘境)’과 다르지 않다. 본래 면목에 의거한 것인 만큼 괜스레 수식을 하지 않아도 그 나름의 멋이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즉, 물성(소재)을 숨기고, 가려진 아름다움(의미)을 적극 드러내는 오브제인 것이다.

▲ 이재효와 못

공존 공간에서 소재의 이면 드러내

이 같은 못 작업은 일련의 나무 작업의 연속성에서 이루어졌다. 많은 작가들이 새로운 장르를 개척할 때, 그는 ‘깊이 있는 새로움’을 추구한다. 이재효는 나무 작업에서 하나의 구를 만들기 위해 수많은 나무를 결합시킨다. 하나하나의 나무를 결합시켜 큰 형상을 이루면서도 그 질감과 특성을 그대로 살린다.

‘나무’는 보편적 자의식이나 자아의지가 세상에 진리나 선을 의기양양하게 선포한다는 주체적 고집을 멀리 한다. ‘못’ 역시 그렇다. ‘나무’와 ‘못’은 개별적 소재의 이면에 이미 타자(非자기)가 동거해 있는 공존이므로, ‘못’과 ‘非못’은 공동존재양식을 맺고 있는 상호의존적 기호(sign)에 해당하지, 독자적인 실체가 아닌 것이다.

‘0121-1110=100013’ ‘제목’은 아니다. 그냥 ‘작품명’이다. 정해진 규칙은 있지만 규정된 제목은 아니다. 남들처럼 멋들어진, 형이상학적인 제목을 뽑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이름과 언제 작업했는지 날짜만 나타낸다. 그는 “너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라고 묻지 말고 “그저 내 아이처럼, 내 친구처럼 그렇게 작품을 바라봐 주기를….”이라고 작가노트에 적었다.

이재효는 작가노트에 나무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드러낸다.

▲ 이재효의 나무 0121-1110=104061.

“나의 마음을 형상화 한 것”

“(2002년) 광화문 네거리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가 붉은 옷을 입고 한자리에 모였든 그때 그 현장에서 나는 ‘만약에 이것이 나의 작품이라면…’하는 생각을 했다. 한 사람 한 사람 모여드는 것은 내가 나뭇가지를 하나씩 쌓아 가는 과정과 흡사하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일까하는 기대는 또한 작품의 완성의 순간을 기다리며 설레는 마음과 같다. 모양이 제각각 다른 자연 그대로의 나뭇가지들은 구나 원기둥과 같이 단순한 형태 속에서도 그 재료적 특성을 그대로 간직한다. 이것은 작품을 통해 내 생각을 표현함이 아니라 재료자체의 이야기를 드러내는 것 , 즉 나의 생각이 아닌 나의 마음을 형상화 한 것이다.”

▲ 이재효의 나무 0121-1110=105121.

선(禪)의 표현은 생명과 만물이 융합하는 것이며, 그 결과로서의 표현은 현실논리와 단절된다. ‘마음을 형상화’하는 작업도 그렇다. 전혀 의식작용이 없는 것처럼 오랜 사유의 결과로서 어떠한 의식도 시간적 여유도 끼어 들 수 없이 직관만 존재케 하고 본질을 캐낸다.

“동산 화상이 한 스님에게 물었다. “부처란 무엇입니까?” 동산 스님이 얼른 답했다. “마삼근(麻三斤)이다.” 같은 질문에 연교 대사는 “오늘 내일”이라 했고, 조주 스님은 “뜰 앞에 잣나무”라고 했다. 향촌 선사는 “오래 앉아 있으니 피곤하구나.”라 했고, 운문 선사는 “해 속에 산을 본다.”고 했다. 당신은 못과 나무에서 무엇을 보는가?  2009.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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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효

■ 이재효는 경기도 양평의 개인 작업실에서 하루 15시간 씩 생각한다. 1992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를 나와 1995년 공산미술제에서 입상했다. 1997년 한국일보 청년작가 초대전에서 대상을, 다음해에 오사카 트리엔날레에서 조각대상과 함께 문화부 제정 오늘의 젊은 작가상을 수상했다. 이재효는 항상 생각을 통한 ‘발견’을 좇는다. 그의 발견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 보다 있는 그대로는 드러내는 작업으로 하찮은 소재에서 ‘진여(眞如)’를 캐내는 작업에 몰두한다.

[이 기사에 대한 반론 및 기사제보 mytrea7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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