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기적은 과장되었다
예수의 기적은 과장되었다
  • 배길몽
  • 승인 2018.12.24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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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배길몽의 ‘지피지기’ 연재 18

인간이 범하는 오류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인식의 오류고 또 하나는 논리의 오류다. 과학이나 종교가 모두 두 가지의 오류를 범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 과학에는 논리의 오류가 많고 종교에는 인식의 오류가 심하다. 그래서 일부 성직자들처럼 세상의 일부만 공부하거나 경험하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하면 그 깨달음은 착각일 수밖에 없다. 과학, 종교, 사회를 두루 공부하지 않은 일부 성직자들의 깨달음은 우물 안의 개구리가 우주 전체를 봤다고 착각하는 것과 유사하다.

전쟁에 나간 장수가 자신의 군대만 열심히 훈련시키고 적의 동태는 살피지 않는다면 어찌 전투에서 이기겠는가? 나를 알고 상대도 알아야 종교를 포함한 모든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불교인들도 불교만 공부할 것이 아니라 과학의 오류와 기독교의 모순도 함께 공부함으로써 스스로 불교의 잘못에 대해서도 탐구해보는 기회를 주려고 이렇게 불교 언론에 과학과 기독교에 대해서 연재하는 것이다.

복잡하고 거대한 분량의 여러 가지 종교의 경전들을 들여다보면 그 결론은 모두 같다. ‘착하게 살자’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각자의 종교들이 자기들만이 착하게 사는 방법과 영생(해탈)에 이르는 길을 안내할 테니까 다른 종교를 믿지 말고 자신의 종교를 믿으라는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 의문이 있다. 첫째 의문은, 정말로 영생(해탈)이 있는 것인가? 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많은 비용(헌금, 시주)을 지불하면서 종교가 추천하는 영생(해탈)에 이르는 단체 여행 상품에 가입하지 않고 개인이 혼자서 스스로 여행하면서 그곳(영생, 해탈)에 이를 수는 없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다. 그래서 수많은 구도자들이 독자적으로 해탈이나 영생에 이르는 길을 찾으려고 여러 가지 경전을 공부하고 수행도 하는 것이며 필자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로서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을 열심히 공부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깨달은 바가 있어서 이렇게 기독교의 성경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다.

필자가 기독교를 비판하는 글을 언론에 올리니까 일부 독자들이 불교도 똑같이 비판하라고 주문한다. 그런데 기독교는 예수 자체를 믿지만 불교는 석가를 믿는 것이 아니라 석가의 가르침을 믿는다는 데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어서 비판하는 방법도 달라야 한다. 믿음의 대상인 예수에게 과장이나 허구가 있다면 비판받는 것이 당연하지만 믿음의 대상이 아닌 석가의 행동에 약간 과장이 있어도 석가의 가르침에 심각한 오류가 없다면 큰 문제가 아니므로 필자는 석가를 비판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예수를 신이라고 주장하니까 예수에게 오류가 있으면 안 되지만 불교는 석가를 깨달은 사람이라고 주장하므로 인간에 불과한 석가에게 약간의 오류가 있어도 용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필자는 어떤 종교가 진리인가 아닌가보다는 그 종교의 교리를 따르면 인류의 평화와 행복에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에 더 관심이 많다.

기독교의 성경을 읽어보면 대부분이 조작됐다고 보이는데 그래도 다행인 것은, 예수가 능력을 나타내는 부분은 조작했지만 사소한 일들은 사실과 비슷하게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형사가 대부분의 사건을 조사할 때에 그러하듯이 예수의 사망과 부활에 대한 사건도 성경에 기록해놓은 사소한 것들에서 진실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으며 요한계시록의 비밀도 엉뚱한 곳에서 실마리를 풀어낼 단서를 찾았다. 우리가 살다보면 유언비어를 자주 듣게 되는데 상식 밖의 이야기는 시간이 흐르면 모두 거짓으로 드러난다. 2천 년 전에도 오늘날과 문명의 차이만 조금 있었으나 사람의 사는 모습은 지금과 비슷했다고 생각하고 성경을 바라보면 좀 더 진실에 가까워지며 이해하기 쉬워진다.

예수는 성직자가 아니라 독립 운동가였고 왕이 되려고 했던 사람으로서 인류의 구세주가 아니라 철저한 민족주의자였으며 민족주의적인 언행은 다음과 같다.

1. 이방인은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보다 못하니까 그들에게는 전도도 하지마라고 말했다(마태복음 10:5~6).
2.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구하는 것 외에는 자신의 임무가 아니라고 말했다(마태복음 15:24).
3. 장차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심판하게(다스리게) 하려고 12명의 제자만 구성했다(마태복음 19:28, 누가복음 22:30).
4. 세상에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가 결국 이스라엘의 회복(독립)이라고 말했다(사도행전 1:6).
5. 종말심판에서 유대에 있는 사람들만 모두 산으로 대피하라고 지시했다(마태복음 24:16, 누가복음 21:21).
6. 예수는 이스라엘을 구속(구원)할 자라고 했다(누가복음 24:21).
7. 예수는 세상의 평화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자기 추종자들의 안녕만을 빌었다(요한복음 17:9).

앞에서 열거한 바와 같이 예수의 관심 대상은 오직 이스라엘과 자신의 추종자들뿐이었다. 물론 기독교에서는 이스라엘이 지리적으로 중동에 위치한 땅위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영적인 나라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모두 직설법을 사용했으므로 의역(영적인 해석)을 해야 할 구절이 전혀 없으며 비유를 들어서 설명한 것들도 사실은 예수 자신의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처럼 비유로 말한 것이다. 누군가에게 상담하기 위해서 친구 이야기라고 꺼내는 이야기가 알고 보면 모두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을 참고하기 바란다. 예수가 성경에서 비유를 든 포도밭 주인이나 탕자의 이야기는 자신의 이야기를 돌려서 한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세례요한의 제자였으며 그렇게 판단할 만한 자료는 다음과 같다.
 
1. 예수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으며 예수가 유대 역사상 최고의 선지자를 의미하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최고’라는 칭송을 요한에게 사용했다.
2. 요한이 붙잡혀 가서 설교를 못하게 되면서부터 예수가 최초로 설교를 시작했다(마태복음 4:12~17).
3. 예수가 요한의 언행과 설교 및 세례를 그대로 답습했다(세리와 비천한 사람들에게 설교, 회개와 천국 도래, 바리새인을 미워함, 물세례를 줌 등).

이와 같이 예수는 세례요한을 추종했고 예수가 자신을 인자(사람의 아들)라고 했으므로 요한에 대해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최고’라는 표현은 요한이 자신보다 우월하다는 것과 요한이 자신의 스승인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헤롯왕이 세례요한을 죽인 이유는 요한이 메시아(그리스도)인 것으로 오해한 탓이다. 메시아의 원뜻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이란 뜻이었기 때문에 헤롯이 요한을 자신의 적으로 여기고 죽였으며 예수도 왕이 되려고 했기 때문에 헤롯과 빌라도가 연합해서 예수를 역적으로 몰아서 십자가에 매달았다. 요한은 머리를 잘리는 참형으로 불운하게 죽었으나 예수는 요행이 십자가에서 다시 살아나서(부활해서) 결국에는 요한보다 더 유명해졌다. 세례요한은 감옥에 갇혀서 죽게 될 운명이었고 예수 자신에게서는 오히려 초능력이 나타났으므로 예수가 자신감을 얻어서 율법과 예언서(선지자)의 역할은 요한으로 끝이 났다고 하면서(마태복음 11:13, 누가복음 16:16) 요한은 메시아(구약에서 예언된 지도자)가 아니며 자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선포한다.

예수의 생애는 술에서 시작해서 술로 끝났다. 예수가 행한 최초의 기적이 혼인잔치 집에서 포도주를 대량으로 만들어 손님들을 술독에 빠트린 것이다. 마시고 남은 포도주 찌꺼기에 독한 술을 부어넣고 물로 희석해서 즉석 포도주를 완성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술을 만드는 기적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아니라 잔칫집에서 미리 준비한 술로 이미 적당히 취한 하객들에게 예수가 엄청난 양의 술을 추가로 권해서 하객들을 모두 고주망태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고 그것은 예수가 술을 금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권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는 평소에도 매우 술을 좋아해서 비난을 받았고(마태복음 11:19, 누가복음 7:34), 최후의 만찬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이스라엘이 독립할 때까지) 다시는 포도주를 안마시겠다고 선포했으나(마태복음 26:29, 누가복음 22:18) 단 하루 만에 금주의 언약을 깨고 십자가에서 해면에 적신 독한 포도주를 먹은 후에 바로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술을 안마시겠다는 것은 역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다시 술을 마시겠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하늘에 있는 나라가 아니라 땅에 있는 나라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스라엘이 아니고 하늘에 있는 나라라면 거기서 술을 마실 리가 없지 않는가? 하늘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는 추후에 상세히 설명하겠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중요한 순간에 예수가 금주를 선포했다면 그 약속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인데 그 중요한 약속을 하루 만에 자포자기의 상태로 깨버렸다. 성경에 나타난 기록들을 살펴보면 예수는 애주가의 정도를 넘어서 알코올 중독자였음이 분명하다. 독립운동을 하면서 받은 생명의 위협으로 스트레스가 쌓여서 술에 빠지는 것은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는 최후의 만찬에서 금주를 선포하면서 자기가 아버지로부터 나라를 받으면(이스라엘의 왕이 되면) 자기 나라를 다시 제자들에게 맡겨서 12명의 제자가 각각 12지파를 다스리게 할 뿐만 아니라 자기가 선포한 금주기간도 해지하고 맛있는 음식과 술을 함께 먹고 마실 것을 약속한다(누가복음 22:29~30). 먹고 마시는 나라는 하늘나라가 아니라 땅의 나라다.

성경에서 먹고 마신다는 표현이 여러 번 나오는데 여기서 먹는 다는 것은 평범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이 아니라 고기음식을 포함한 산해진미를 먹는다는 뜻이고 마신다는 것도 맹물이 아니라 술을 마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금식하고 기도하는데 예수의 제자들은 먹고 마심으로 비난받았는데(누가복음 5:33) 예수가 그렇게 하라고 권했기 때문이며(누가복음 10:7) 이들을 본받아서 초대교회에서도 술에 취하는 일이 흔히 있었다(고린도전서 11:21).

예수가 부활한 후에도 사도행전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종(하나님의 종은 사람에게만 쓰는 용어임)이며(사도행전 3:13, 26, 4:27,30) 선지자(예언자; 인간)로서(사도행전 3:22) 스스로 부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활시켰다고(사도행전 2:24, 32, 3:15, 4:10, 5:30, 10:40) 함으로서 예수가 인간임을 명확하게 규정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예수가 신이라는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를 메시아(지도자)로 인정한 증표로 본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 이전에는 예수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었는데, 부활을 확인한 후에야 믿음이 생겼다는 것을 역으로 해석하면, 부활 이전에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것이나 5병2어와 같은 기적들을 못 보았기 때문에 믿음이 없었던 것이므로 성경에 기록된 예수의 모든 기적은 실제로는 없었다는 것을 명확하게 반증하고 있다. 제자들이 목격자들로부터 예수가 부활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전혀 믿지 않았다는 것은 예수가 죽은 자를 살려내는 능력이 있음을 과거에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죽은 자를 살려내는 예수의 능력을 십자가 사건 이전에 보았다면 예수의 부활 소식을 들었을 때에 어찌 예수의 부활을 의심했겠는가?

예수의 기적이 모두 가짜라는 것을 예로 들어 설명하겠다. 예수가 행한 대표적인 기적이라고 볼 수 있는 5병2어의 기적에서 일일이 빵과 고기를 뜯어서 나누어 주려면(성경에도 그렇게 묘사돼있고 또 그래야 다시 부풀어 올라서 원상이 복구돼서 계속 나누어 줄 수 있으며 빵을 통째로 주어버리면 더 이상 다른 사람들에게 빵을 줄 수가 없다) 다시 부풀어 오른 다음에 뜯어주는 시간을 고려해서 배식시간을 1인당 5초씩만 계산해도 무려 7시간이나 걸린다. 그리고 제자가 돈으로 음식을 사오겠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외식 산업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단 50명분의 식사도 쉽게 구하기 힘든데 물류나 외식업이 거의 없던 2,000년 전의 농경사회에서 어디에 가서 갑자기 5,000명분(여자와 어린이까지 포함하면 만 명 정도)의 음식을 구하며 어떻게 운송하고 배식하고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예수가 그런 창조능력이 있다면 왜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안식일에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남의 밭에 있는 밀 이삭을 비벼먹었을까?

사실은 예수가 기적을 보여주지 못했으므로 제사장들도 자신 있게 그를 고소해서 십자가에 매단 것이며 만일 예수가 기적을 보여 주었다면 누가 감히 그를 처벌하자고 하며 또 빌라도가 예수를 구해줄려고 군중들에게 질문했을 때도 그들이 주저 없이 예수의 처형에 찬성했겠는가? 군중들이 정말로 5병2어의 기적을 보았다면 아마도 5천 명의 군중이 5만 명으로 늘어나서 감히 제사장들이 고소할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그리고 광야에서 5천명은커녕 500명만 모여도 음향시설이 없이 육성으로는 설교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참고하기 바란다.

예수가 고향에서 푸대접을 받게 됐을 때에 선지자가 원래 고향에서 대접받지 못한다고 변명했는데, 선지자가 고향에서 대접받지 못한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타향 사람들은 선지자가 성장한 후의 거룩한 모습만 보게 되므로 그를 존경하지만, 고향 사람들은 선지자가 어렸을 적에 행한 거룩하지 못한 모습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선지자를 존경하지 않게 된다. 성경에는 예수가 수많은 기적을 행한 것처럼 기록하고 있지만, 신적인 능력으로 기적을 실제로 보여 주었으면 예수가 고향에서 푸대접을 받을 리가 전혀 없다. 예수는 부모형제와 친척들에게도 신뢰를 얻지 못했으며(요한복음 7:5, 마가복음 3:21) ‘인자가 머리를 둘 곳도 없다.’면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기도 했다. 오늘날의 이단 종교의 교주들도 모두 고향에서 대접받지 못한다. 그들이 사고를 치면서 성장하는 모습을 고향사람들은 봤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오는 기적은 약간의 병 고침을 제외하고는 모두 진실이 아니며 예수와 바울이 스스로 그것을 인정한 말이 성경에 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에게서 표적(메시아 즉 하나님이 인정한 지도자라는 증거)을 원하므로 예수가 자신이 보여 줄 표적은 없고 오직 ‘요나의 표적(부활)’밖에 없다고 했고(마태복음 16:4 누가복음 11:29), 또 바울이 고린도전서 1장 22~23절에서 표적을 원하는 유태인과 지혜(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그 당시 학문적으로 매우 앞서가던 그리스의 지성인들이 요구하는 철학적이거나 자연과학적인 지식을 말하는 것으로서 예수에게는 그것이 없었다)를 원하는 헬라인에게 예수를 전도하는 것은 미련한 짓이라고 한 것은 예수에게는 지혜와 표적이 없어서 그것을 보여 주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리고 바울이 성경에서 많은 은사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으나 그것들을 감히 표적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그런 정도는 타 종교나 무속에서도 흔히 일어나고 있었으므로 자기들만의 표적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기도원장이나 유명한 목사들처럼 예수도 약간의 초능력이 있었는데 제자들이 예수를 왕이 될 사람으로 믿게 하려고 사소한 것들을 표적이나 기적의 수준으로 과장해서 성경에 기록했다. 예수의 표적은 오직 하나 즉 부활(요나의 표적)이었는데 그것은 표적이 아니라 사고였으며 착각이었고 실제로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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