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렙] 완도군은 해상전략요충지였음에도 불구하고 1896년(고종33년)에야 군(郡)이 만들어졌다. 영암·해남·강진·장흥에 속했던 섬들을 한데 묶어서 완도군을 만들었다. 완도·고금도·신지도·조약도는 강진현에 속했었고, 노화도·보길도·소안도는 영암군에 속해 있었다. 국립교육기관인향교는 1군1현에 하나씩 세웠기에 완도군의 설치와 함께 향교도 건립되었다. 완도는 여러 섬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므로 향교의 건물에 사용되는 목재도 여러 섬에서 공급하였다. 대성전은 완도, 동재는 고금도, 서재는 신지도, 명륜당은 노화도에 있었던 진(鎭)의 건물을 해체하여 나온 건자재를 재활용하여 지은 향교이다.
향교의 지형적 입지에는 전통적으로 세 가지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가장 이상적인 자리였다.
첫째 관아에서 2-5리 안에 있어야 했고,
둘째 산의 정기를 받기 위해서 산의 능선 위에 대성전을 지어야 했고,
셋째 문필봉이 보여 청운의 꿈이 이루어지는 것을 예견하는 산이 보여야 했다.
향교는 국립교육기관이었으므로 관아의 지원과 감독을 받았으므로 관아와 지근거리에 있어야 했다. 산은 정신을 의미했고 인재를 의미했으므로 산봉우리와 연결되는 능선에 대성전을 지어 유학을 진작시키고 명륜당을 지어 인재를 양성하고자 했다. 학생들의 목표는 과거 급제나 관료진출이었다. 학문과 벼슬의 상징이 문필봉이었으므로 문필봉이 보이는 곳에 향교를 지었다. 향교를 지을 때에는 위의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고자 노력하였다. 덧붙여 향교는 축선을 중심으로 통일된 공간을 조성하는데 완도향교의 정문은 축선상에 있지 않고 서쪽에 치우쳐져 있어서 대지를 조성함에 있어서 조급했음을 드러내고 있다.
완도향교의 지형과 입지를 살펴보면, 세밀하게 신경쓰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관아에서 향교까지의 직선거리가 10리가 넘는다. 이는 관아가 지원할 겨를이 없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음 산의 능선이 아니라 산복(山腹)에 입지하고 있고 문필봉도 보이지 않으므로 관료를 배출하기 보다는 군으로써 구색 갖추기로 볼 수 있다. 풍수공간은 지형에 의지할 뿐만 아니라, 지형에 근거하는 인문학적 해석에서 풍수의 메카니즘이 완성되는데 지형의 결점은 풍수메카니즘의 불확실성을 증대시킨다. 완도향교는 1910년 경술국치를 맞이하여 향교의 기능도 수명을 다하였으니 조선시대에 기껏 13년 정도 향교가 운영되었을 뿐이다. 완도군이 설치되고 향교를 지으면서 완벽하다기 보다는 서툴게 진행된 정황이 곳곳에 보인다. 조상들은 아무데나 향교를 짓지 않았다. 우리 조상들은 지형의 형상에 인문학적 상상을 부여했고 그것으로 후세들과 소통했다. 완도 향교는 그런 점에서 부족함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