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감세 2년 유예가 갖는 정치적 함의는
부자감세 2년 유예가 갖는 정치적 함의는
  • 최재천 변호사
  • 승인 2009.12.27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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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기획재정위원회는 23일 전체회의를 열어 내년부터 시행하기로 한 ‘부자감세’를 2년간 유예하기로 결론 내렸습니다. 사실상 무의미하다는 이정희 의원의 날카로운 비판도 있습니다만, 분명 의미는 상당할 것 같습니다. 거시적 차원의 정치적 의미에서입니다.

첫째, 국회가 조세법률주의의 의미를 명확히 했다는 점입니다. 국회의 예산심의가 형식적인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번만큼은 국회가 주도권을 가지고 예산 법률주의의 의미를 분명히 했지요. 조세와 예산은 근대국가의 출발점부터 국회에 부여된 확고한 권한이었습니다. 인신에 대한 권리는 영장주의를 통해 법원에 주고, 재산에 대한 권리는 조세법률주의와 예산법률주의를 통해 국회에 주는 방식으로 왕권을 견제하고 삼권분립을 만들어냈던 것이 근대국가의 원리이자 삼권분립입니다. 그런 점에서 헌정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지요.

다만 내년 지방선거를 의식한 일시적 조치의 성격이 강하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러면 2012년은 가능할까요. 그때는 총선과 대선이 있지요. 2년 유예의 의미는 사실상 이 정부 남은 3년의 유예를 의미하는 것이고, 다음 국회, 다음 정부가 부자감세에 대한 결정권을 갖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세월은 금방 흘러갈 수도 있네요.

백걸음 양보해서, 지방선거를 의식한 일시적 조치라 하더라도 정치적 의미는 상당하지요. 민심의 결이 그렇게 읽혀졌다는 의미 아닐까요. 민심이 이제 감세는 안 된다, 균형재정이 필요하다, 이렇게 변했다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민심 차원의 변화가 여의도 차원의 변화로 파급되었다는 또 다른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야말로 헌법 교과서가 예정하는 국민주권입니다. 그리고 민주주의입니다.

둘째, 신자유주의의 상투 끝을 잡고 있던 우리 정부의 감세론이 처음으로 벽에 부딪힌 케이스입니다. 신자유주의는 감세, 무규제, 작은정부, 자유무역 등으로 대변될 수 있지요. 우리는 감세, 무규제는 맞는데, 큰정부를 추구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재정적자가 심각해지는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세계 3위 수준의 각종 경기부양책을 통해 엄청난 재정을 쏟아 부었고, 4대강 사업이 보여주듯 대규모 토목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지요. 재정 건정성이 급속도로 악화되고 출구 전략이 고민될 시점에 이른 겁니다.

오죽했으면 독일은 2016년까지 균형예산을 달성하기로 여야간에 합의 하에 헌법을 개정해버렸습니다. 아예 헌법에 못박아버렸습니다. 이 점에서 독일은 일본과는 특별히 대비되고, 달러 찍어내기로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있는 미국과도 완전히 다릅니다. 아직 우리는 이 정도의 전략은 아니지요. 다만 굳이 평가하자면 신자유주의의 절대론이 처음으로 벽에 부딪힌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정부의 경제 철학 기조가 처음으로 조정기를 맞이하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한나라당이 절대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국회에서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듭니다. 분명한 조정기입니다. 정책의 변환이 느껴집니다. 정부도 반응을 보니 수용할 수밖에 없는 모양입니다. 원래 정부 입장은 감세기조의 유지였지요. 그런데 기재위 소위가 물꼬를 바꿨고, 기재위 전체회의가 이를 따르게 된 것이지요. 좁게 보면 국회차원이면서도 다수당인 한나라당 차원이라는 점이 상당한 정치적 함의를 던져줍니다.

셋째, 한나라당과 정부의 정책 지형이 어떻게 변하게 될지도 궁금해집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여론조사 상으론 영국 보수당이 압도적으로 집권 노동당을 앞지르고 있었지요. 그런데 최근 여론조사가 변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연말을 맞이하면서 계층 문제가 내년 선거의 가장 큰 이슈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경제가 아니라 계층입니다. 영국 경제가 죽을 쑤면서 계층 문제가 되살아났습니다.

얼마전 노동당의 브라운 총리는 영국 의회에서 보수당수 캐머런을 두고, “이튼의 운동장에서 꿈꾸던 세금 정책을 추구한다”고 비판했습니다. 감세론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의미합니다. 계층문제를 전면화시킨 것이지요. 부자들이 사립학교, 이튼 스쿨에서 꿈꾸던 세금정책이라면 결국 부자감세를 말하는 것이 되겠지요. 브라운 총리가 나서서 보수당의 정책을 특권계급만을 위한 정책으로 공격하고 나선 겁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이런 식의 공격방법을 두고서 난리가 났겠지요. 엉뚱하게도 법인세를 인하했던 참여정부를 두고 조중동이 이런 식의 공격을 즐겼었지요. 종부세를 두고 십자포화를 퍼부었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참 어처구니없는 공격이지요. 부자감세는 국가부채로 이어지거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간접세 형식의 조세전가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은 말이 없지요. 언론은 한쪽 편만 쳐다보지요.

박지성 선수는 세금을 50% 내고 있지요. 우리나라 최고 부자는 35%이지요. 영국은 사회주의 국가인가요. 그런데도 우리는 33%로 내리자는 게 정부의 본래 입장이었지요.

영국 정부는 지난 주 런던 금융인들의 연말 보너스에 50%나 되는 세금을 매기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여론조사 전문가는 ‘노동당 입장에서 매우 현명한 전략’이라고 표현했습니다(뉴스위크 한국판 12월 23일자). 보수당의 캐머런 당수가 상속세를 낮추려는 의지가 워낙 확고하기 때문에 이런 논법이 가능합니다. 우리나라와 같은 언론 지형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논쟁 구조이지요.

지금까지 한나라당의 기조는 철저히 신자유주의 일변도였습니다. 부자감세가 낙수효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쪽이었습니다. 부자감세가 투자로 이어지고, 일자리 증가로 이어지고, 아랫목이 따뜻해야 윗목까지 따뜻해진다고 홍보해왔습니다. 이런 감세 철학을 바탕으로 보수기득권 계층의 절대적 지지를 획득해 왔지요. 이런 철학에 대한 보수언론의 지지가 있었고, 종편 편성을 매개삼아 언론의 지지를 유지해올 수 있었고, 이른바 집토끼와 산토끼 논쟁에서 철저히 집토끼를 지키고 보호하는 쪽에서 국가정책을 설계하고 집행해 왔거든요. 어찌됐건 정책의 조정과 변화가 시작된 셈이지요. 이를 지켜보는 이른바 집토끼의 반응이 궁금해집니다. 제비 한 마리가 왔다고 해서 봄이 온 것은 아닌데, 저는 이미 봄이 온 것으로 판단해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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